항목 ID | GC02401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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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裵相說 |
영어음역 | Bae Sangyeol |
이칭/별칭 | 군필(君弼),괴담(槐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가계]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군필(君弼), 호는 괴담(槐潭). 여말선초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배행목(裵行睦), 아버지는 배집(裵緝),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경여(權慶餘)의 딸이다.
[활동사항]
배상열은 1760년 안동부(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2리 녹동)에서 태어났다. 5~6세에 이미 글을 읽고 썼으며, 온순하고 단아한 용모와 성품을 가졌다. 일찍부터 천지조화와 우주의 이치에 관심을 가져 11세에 어느 스승에게 수학하러 갔다. 그 스승이 배상열의 능력을 파악하려고 글을 지으라고 하자 즉석에서 “수금목토수 인의예지학(水土木金修 仁義禮智學)”이라 답하여 온 좌중을 깜짝 놀라게 했으며 이후로 신동, 귀재로 찬사를 받았다. 15세에 『역학계몽(易學啓蒙)』, 『율려신서(律呂新書)』 등의 천문·역학 서적을 탐독하여 상수학(象數學)에 깊은 조예를 가지게 되었다.
21세에 안동부 일직현(一直縣) 소호(蘇湖, 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후학을 지도하던 퇴계학맥의 주요 계승자인 대산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상정은 “그대는 천문·성력(星曆)을 먼저 했으니, 이제는 마땅히 도학(道學)을 공부하라.”라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대학(大學)』을 연구하면서 일취월장하여 일가의 경지를 이루었으며 그 결과 『사서찬요(四書纂要)』 등이 저술되었다.
이상정과 이기(理氣)와 의리지학(義理之學) 등에 관해 질의와 토론을 주고받았으며 그 내용은 『호상종학록(湖上從學錄)』에 남기고 있다. 그 뒤 29세에는 이상정이 이미 죽은 뒤여서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을 찾아가 문인이 되었다. 배상열은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는 풍류처사이기도 하면서 벼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 산수를 즐겨 집 근처 괴화나무 아래에 작은 연못을 파고는 직방당(直方塘)이라는 이름을 짓고 늘 여기에서 독서하였기 때문에 배상열은 ‘괴담처사(槐潭處士)’라고 불렸다. 1789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배상열은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란 무엇인가? 기(氣)의 주재(主宰)요, 기란 이의 재료(材料)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주리적 성리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도(道)와 기(器)를 대비하여 “도는 그릇이 아니므로 형상이 없고, 그릇은 도가 아니므로 스스로 설 수 없다.”라고 하여 이(理)와 기(氣)를 도(道)와 기(器)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소암(素巖) 김진동(金鎭東)은 “괴담은 천지조화(天地造化)의 묘한 이치, 인륜일용(人倫日用)과 신심성명(身心性命)의 원리,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이치도 직접 체험해서 마음에 터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생물을 죽이지 않았고, 돋아 오르는 새순도 꺾지 않았다.”라고 하여 천지자연의 조화를 실천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괴담유고(槐潭遺稿)』가 있으며, 저술로는 『성리찬요(性理纂要)』, 『사서찬요(四書纂要)』, 『계몽도해(啓蒙圖解)』, 『서계쇄록(書計瑣錄)』, 『도학육도(道學六圖)』 등이 있다. 문집 중 시는 「관물음(觀物吟)」과 「자탄(自嘆)」 두 편만이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2리 녹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후손들이 중심이 되고 여러 후학들과 힘을 모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2리 녹동에 녹동리사(鹿洞里社)를 지어 기리고 있다. 2020년 2월 17일 녹동리사(鹿洞里社)와 직방당(直方塘)은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17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