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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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晩慤 |
영어음역 | Yi Mangak |
이칭/별칭 | 근휴(謹休),신암(愼庵),암후(巖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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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
성별 | 남 |
생년 | 1815년 |
몰년 | 1874년 |
본관 | 진보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근휴(謹休), 호는 신암(愼庵)·암후(巖后).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11세손이다. 할아버지는 병조참판 이태순(李泰淳), 아버지는 통덕랑 이휘운(李彙運),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로 류회문(柳晦文)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만각은 안동부(安東府) 예안현(禮安縣) 하계리(下溪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고 아버지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1832년(순조 32) 호상(湖上)에 있는 소암(小庵) 이석균(李鉐均)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소암에게 태극(太極)의 의미에 대해 묻는 편지가 전한다. 또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도 왕래하면서 수학하였는데 여기에서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과도 교유하였다. 1865년(고종 2) 직지사(直指使) 박규수(朴珪壽)의 추천으로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만각은 일찍이 영리(榮利)의 뜻을 버리고 경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깊이 연구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또 당대의 석학 이돈우(李敦禹), 강건(姜楗), 윤최식(尹最植) 등과도 교의를 맺고 학문에 대한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간에 있었던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을 연구하여 더욱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신암집(愼庵集)』 10권 5책이 전해지고 있다. 또 『퇴계전서(退溪全書)』 중 긴요한 종지(宗旨)만을 발췌하여 『계서약선(溪書約選)』을 편집하였으며, 고증학에도 밝아 용학의목(庸學疑目)인 『암후유기(巖后類記)』를 남겼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효자암(孝子庵) 묘좌(卯坐)의 언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