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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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禮安縣 |
영어음역 | Yean-hyeon |
영어의미역 | Yean-hyeon Administrative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명자(역사) |
[정의]
1413년(태종 13)부터 1895년까지 안동 지역의 예안면·도산면·녹전면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행정기관.
[제정경위 및 목적]
예안현(지금의 예안면)은 고구려의 매곡현(買谷縣)이었다가 신라 땅이 되었으며, 경덕왕 때 선곡현(善谷縣)으로 고쳐 내령군(奈靈郡, 지금의 영주)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때 성주 이능선(李能宣)이 고려에 귀순하자 의리를 가상히 여긴 태조의 명으로 예안군으로 승격하였다. 1018년(현종 9) 길주(吉州, 지금의 안동)에 속하였다가 1376년 (우왕 2) 다시 예안군으로 승격하였고, 1389년(공양왕 1) 안동부에 속하였다. 1401년(태종 1) 예안 사또를 두고 감무라 칭하였고, 1413년(태종 13) 예안현이 되었다.
[내용]
1. 예안의 지리
예안(禮安)은 ‘예(禮)’가 땅을 뜻하므로 ‘살기 좋은 편안한 곳’ 또는 ‘기름진 땅’이라는 뜻으로 예부터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고 삼재(三災)를 당하지 않는 곳으로 여겼다. 낙동강 상류에 자리 잡은 분지 지역으로 영지산(靈芝山)·도산(陶山) 등에 둘러싸여 있으며 낙동강의 지류인 분강(湓江)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 영해부(寧海府) 임현(任縣) 영양(英陽) 경계까지 41리, 남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 11리, 서쪽으로 영천군(榮川郡) 경계까지 39리, 북쪽으로 봉화현(奉化縣) 경계까지 41리 거리이다. 서울까지의 거리는 545리이다.
2. 도로와 다리
신라 때 교통·군사의 요지로, 조선시대에 서울은 545리, 감영(監營)은 240리, 좌병영(左兵營)은 450리, 통영(統營)은 700리, 수영(水營)은 540리 떨어져 있다. 남으로 안동 지경까지 15리, 북으로 봉화 지경까지 30리, 동으로 영양 지경까지 41리, 서로 영천 지경까지 39리이다.
동쪽으로는 의인(宜仁)을 지나 청기(靑杞)·영양(英陽)에 이르는 도로가, 북쪽으로는 영주·봉화·재산(才山) 등을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의 도로를 따라 안동과 예천으로 갈 수 있었다. 부라포(浮羅浦)에 부라진교(浮羅津橋)가 있는데 영양이나 진보로 통행하는 벼슬아치들의 길이었다. 봄여름에 물이 불어나면 배로 왕래하였다.
3. 성곽
예안현 뒤 북산(北山)에 돌로 쌓은 성이 있다. 둘레가 1,049척이며 높이가 4척이다. 성문 위 누각은 60명이 앉을 정도의 크기이며, 성안에는 관창(官倉)이 있다. 1591년(선조 24)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개축하였고 고을의 의견에 따라 권식(權湜)에게 도감(都監)을 맡겨 중축하였다.
4. 역원
현 남쪽 5리에 창락도(昌樂道)에 소속된 선안역(宣安驛)이 있고, 현 서쪽 4리에 대사원(大寺院)이 있다. 1603년(선조 36) 태수 안욱(安旭)이 사목에 의거하여 무술을 가르치고자 세웠는데 설립 당시 다른 지방에서는 설립된 예가 없다.
그로부터 이곳에 터를 잡고 무인 가운데 덕망이 있는 자를 무학장(武學長)으로 임명하고 생도 가운데 한 사람을 유사(有司)로 삼았다. 생도는 사족들 가운데 글자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뽑아서 무술을 가르쳐 재주를 시험하고, 상사(上使)가 순행할 때 시험에서 떨어지면 군역(軍役)에 편입시켰다.
5. 호구(戶口)와 전부(田賦)
원호(元戶)가 1,661호이고, 인구는 5,492구 가운데 남자 2,949구, 여자 2,542구이다. 밭과 논이 1,408결 16부 6속이다. 밭이 1,036결 5부 7속인데 그 가운데 각종 섞인 것이 522결 3부 6속이다. 논은 372결 10부 9속인데, 그 가운데 진잡답(陳雜畓)이 148결 18부이다. 실제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는 밭 516결 12부, 논 124결 10부 1속이다.
6. 시장과 토산
매월 2일과 7일에 읍내 장(場)이 열린다. 도동장(陶洞場)은 도동리에 있고 매월 1일과 6일에 열린다. 오천장(迃川場)은 원당리(元塘里)에 있다. 매월 3일과 9일에 열린다. 토산물로는 인삼, 꿀, 송심(松蕈), 은구어(銀口魚), 철(鐵), 오미자(五味子), 석심(石蕈), 잣[海松子], 칠(漆), 백복령(白茯笭), 설면(雪綿)이 있다.
7. 봉수
현 서쪽 30리에 있는 녹전산(祿轉山)에 있다. 남쪽으로는 안동 개목산(開木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영천(榮川)의 창팔래산(菖八來山)에 알린다. 서로의 거리가 20리이다. 북쪽으로는 봉화현 용참산(龍站山)에 알려 준다. 별장(別將) 1명에 군사는 100명이다.
8. 학교
향교(鄕校)는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동서원(易東書院)은 현 동쪽 10리 일월산맥(日月山脈)이 다한 서쪽 기슭 낙동강 동쪽 언덕에 자리 잡았다. 고려 때 좨주[祭酒] 벼슬을 한 우탁(禹倬)은 역학(易學)이 깊었는데 단양(丹陽)에서 현의 남쪽 지삼촌(知三村)에 이사 와서 살았다.
1570년(선조 3) 이황(李滉)이 우탁을 위해 원우(院宇) 세우기를 발의하여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여 혈식 군자(血食君子: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애써 먹는 이)를 위해 영원히 제사하는 장소로 삼았다. 상현사(尙賢祠)·명교당(明敎堂)이 있고, 서쪽의 큰 방은 직방재(直方齋), 동쪽의 작은 방은 정일재(精一齋)이다. 그 아래 동서로 양재(兩齋)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이 삼성재(三省齋), 서쪽에 있는 것이 사물재(四勿齋)이다. 양재의 남쪽에 있는 큰 대문은 입도문(入道門)이라 하였다.
당 안 동쪽 벽면 양쪽에는 이황의 시와 서원 기문을 새겨서 걸어 두었다. 직방재 안의 또 다른 작은 방인 광명실(光明室)에는 서책 및 『월천선생실록(月川先生實錄)』, 「춘추대제시(春秋大祭時) 항용축문(恒用祝文)」 등이 소장되어 있다. 역동서원에는 이미 노비와 전답이 있었고, 항상 300석의 곡물이 비축되어 있어 그것을 편리하게 이용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1684년 편액이 하사되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현 동쪽 10리 도산(陶山) 안에 있다. 1574년(선조 7)에 세워 이황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이황은 이 자리 양쪽에 재사(齋舍)를 지어 기거하면서 시를 읊조리는 장소로 삼았다. 인근에 사는 문인들이 줄지어 이황을 모시고 문답하는 자들이 수없이 찾아왔고, 먼 곳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재(齋)에서 가운데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 동쪽에 있는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이라 하고 둘을 합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 하였다. 서당 오른쪽에는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관란헌(觀瀾軒)이 있는데 모두 합하여 농운정사(隴雲精舍)라 하였다.
재 앞에는 작은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하였고, 그 곁에는 몽천(蒙泉)이라는 샘이 있었다. 샘 위에 단을 쌓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어서 절우사(節友社)라 하였다. 재 앞에 뜰이 있는데 늘 사립문을 닫아 두어서 유정문(幽貞門)이라 하였고, 재 서쪽 가에는 역락재(亦樂齋)가 있다. 1575년 편액이 하사되었고, 1576년 이황을 봉안하였다.
상덕사(尙德祠)와 전교당(典敎堂)이 있고, 당 아래 동쪽에 박약재(博約齋), 서쪽에 한존재(閑存齋)가 있다. 양쪽 재사 남쪽에 커다란 진도문(進道門)이 있고, 문 남쪽에 완락재와 농운정사가 있다. 방 안에는 이황의 「도산기(陶山記)」·「십팔절(十八絶)」, 조목(趙穆)의 「춘추제향 항용축문」이 있다. 그 밖에도 노비와 전답들이 충분하게 있었다. 뒤에 문인 조목을 종사하였다.
청계서원(淸溪書院)은 온계리(溫溪里) 동쪽에 있다. 1667년 세워 이식(李埴)을 제사하였고, 이우(李堣)·이해(李瀣)를 부향(祔享)하였다. 분강서원(汾江書院)은 분천(汾川) 가에 있다. 1702년에 세워 이현보를 제사하였다. 묘(廟) 안에 유상(遺像)을 간직하였다.
마곡서원(磨谷書院)은 현 서쪽 10리에 있다. 변계손(卞季孫)·김유용(金有庸)·이완(李完)·김생명(金生溟)·박사희(朴士熹)·류빈(柳贇)·윤의정(尹義貞)을 배향한 곳이다. 정사(精舍)로 있다가 서원으로 올랐다. 동계서원(東溪書院)은 부라리(浮羅里)에 있다. 금난수(琴蘭秀)·이안도(李安道)를 배향한 곳이다. 정사로 있다가 서원으로 올랐다.
낙천정사(洛川精舍)는 현 남쪽 5리에 있다. 김효로(金孝盧)·김연(金緣)·김부인(金富仁)·김부필(金富弼)·금응협(琴應夾)·김부신(金富信)·김부의(金富儀)·김부륜(金富倫)·금응훈(琴應壎)·김기(金圻)·김해(金垓)를 배향한 곳이다. 한천정사(寒泉精舍)는 현 동쪽 15리에 있다. 김택룡(金澤龍)을 배향한 곳이다.
[변천]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정으로 안동부 예안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에 편입되어 읍내면·동하면·동상면이 예안면으로, 서면·북면이 녹전면으로, 의동면·의서면이 도산면으로 통합되었다.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시에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