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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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惟樟 |
영어음역 | Yi Yujang |
이칭/별칭 | 하경(夏卿),고산(孤山),마애(磨崖),나암(懶庵),우원(芋園),우포(芋圃),사익당(四益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종석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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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
성별 | 남 |
생년 | 1625년 |
몰년 | 1701년 |
본관 | 전의 |
대표관직 | 익위사익찬 |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하경(夏卿), 호는 고산(孤山)·마애(磨崖)·나암(懶庵)·우원(芋園)·우포(芋圃)·사익당(四益堂). 5대조 이훈(李薰)이 처음으로 풍산(豊山)에 입향하였다. 할아버지는 주부를 지낸 이진(李珍), 아버지는 통덕랑 이정발(李廷發),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대구부사 김윤안(金允安)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유장은 경상부 안동부 풍산현(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일대) 상리리에서 태어났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이 해 어머니가 중풍으로 자리 보전하자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 1667년에 대두솔촌(大兜率村)에 우거(寓居)하였다. 10년 긴 세월을 하루같이 어머니를 간호하다가 상을 당하자 부친상 때와 같이 3년 동안 죽을 마시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복상을 마치고 나서는 세상일에 뜻이 없어 문을 닫고 독서와 궁리(窮理)에 전심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는데 남을 계도할 때는 허물을 묻어 주고 좋은 점을 칭찬하여 매번 감화로 일깨웠다.
1689년(숙종 15) 대신이 행고학우천이독실(行高學優踐履篤實: 학문이 높고 행실이 믿음직함)로 천거해서 6품에 올라 와서별제(瓦署別提)와 공조좌랑으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1691년에 안음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같은 해 겨울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으로 제수되었지만 입직한 지 7일 만에 하향하였다.
하향 길에 양주(楊州) 도봉서원(道峰書院)에 들렀다가 평소 자주 왕래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던 당대의 석학인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을 만났다. 1694년 평소 도의로 깊이 사귀었던 이조판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하향하면서 이유장을 영남의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으로 천거하였다. 이유장은 1701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이유장은 온화한 성품에 신중하여 겸손했으나 의리의 득실을 논함에 있어서는 ‘갑이라 하여 모두 옳을 수 없고 을이라 하여 모두 그를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엄정하고 명백하게 시비를 가렸다. 또 제술(製述)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혹 남의 강청에 못 이겨 짓게 되더라도 글이 쉽고 소박 간명하며 미사여구를 오용함이 없었다. 또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좀처럼 시를 짓지 않았으나 어쩌다가 감흥이 일어 읊게 되면 그 풍격이 한아(閒雅)하고 전중(典重)하여 한 점의 속기(俗氣)가 없었다고 한다. 글씨는 단아하고 비범하여 정경세도 가끔 글을 지어서는 이유장에게 가서 글씨를 받아갈 정도였다.
[학문과 사상]
이유장은 경학(經學)을 주로 하여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등의 송학(宋學)에 잠심하여 성리 탐구에 독실했으며, 주자(朱子)와 이황(李滉)의 예설(禮說)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이론을 수립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원집 8권, 부록 2권 모두 5책의 『고산집(孤山集)』이 있으며, 증손 이홍진(李弘辰)에 의해 간행되었다. 기타 주자와 이황의 예설을 절충하고 이론(異論)을 분류하여 『이선생예설(二先生禮說)』을 편찬하고, 우리나라 역사책을 산절(删節)하고 요약한 뒤 자신의 의견을 곁들인 『동사절요(東史節要)』를 지었다.
[묘소]
묘소는 안동시 풍산읍 북쪽 현공산(懸空山) 용감동(龍甘洞)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여만(金如萬)이 행장을 짓고, 조덕린(趙德隣)이 묘비명을 지었다. 1729년(영조 5) 동향의 인사들이 안동에 낙빈정사(洛濱精舍)을 세워 이유장을 향사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