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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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山 |
영어음역 | Yongsan |
영어의미역 | Yongsan Mountain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예경희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에 있는 산.
[개설]
용산동의 동명은 용산에 유래된 이름으로 용산동에는 지금의 지현동, 역전동(현 문화동)까지 포함되어 있어 충주의 요지를 점하였다. 옛날의 충주관아였던 충주군청 건물도 용산을 향하고 있음을 볼 때 과연 명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칭유래]
용산은 남산의 낙맥인 잔구로서 산상에 작은 못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다. 용산의 작은 못에 용이 살았다는데 용이 승천하면 마을이 번영하고 큰 인물이 난다고 하는 술자의 말이 있었다. 충주 고을이 고구려 치하에 들어갔을 때 풍수술자가 충주 고을이 왕이 탄생할 기운이 있다고 하여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용산에 못을 파고 석탑을 세워 지맥을 눌렀다는 전설이 있다.
[자연환경]
충주시 남산(636m, 일명 금봉산)의 맥을 이어 받았다고 하는 용산은 구릉성 잔구로서 산이라기보다는 작은 언덕이다. 1912년 충주전매지청 건립 시에 작은 못을 메우고 석탑을 제거할 때 석탑천도 메우게 되었다고 한다.
[현황]
용산에는 충주전매지청 외에도 현재 금릉동으로 이전된 충주세무서가 있었다. 용산동사무소 앞에는 용산동 유래비가 세워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산은 남산의 낙맥인 야산소릉(野山小陵)이며 산상에 작은 못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용산이라 유래한다(지금의 전매청 자리). 이때부터 부근 동명을 용산리라 부르며 동세(洞勢)가 광범위하여 충주의 발원지라고 자칭하였다. 현재 충주중학교 부근에는 송정이들[松停坪]이 있었는데 신라 진흥왕 때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서 귀족과 육부 사람들이 옮겨와 번영을 이루던 곳이다. 이곳은 기와집이 4천호가 있었다고 하여 사천개(四千蓋)라 전해오며, 고려 때 어떤 학자는 남산과 용산의 지맥은 천룡지호(天龍地虎)의 명기(明氣)와 혈(穴)이 성지(聖地)로 형성되어 있어 장차 큰 인물이 탄생할 곳이라 하였다. 1780년(정조 4년)에는 남변면 용산리로 55호에 510명이 살았고 조선 후기까지에는 북변면과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어 중부지방까지 운집하여 성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충주의 역사와 함께 해 온 용산동은 각급 학교가 밀집하여 교육의 요람을 이루고 있다. 이에 동민의 결집된 의지로 애향애족, 충효, 예의의 일념을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달하노라.”
용산동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용이 승천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승천한 용이 마을의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을 굳게 믿고 언제부터인가 용의 승천제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 그런데 1995년 충주시군 통합을 기념하여 제1회 거룡승천제를 거행하였고, 2000년 1월 18일에는 제6회 행사를 거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