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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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陵洞遺蹟 |
영어의미역 | Relics in Geumneung-d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금릉동 277-1[충원대로 724]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철기,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강민식 |
성격 | 고분|구덩 유구|토광묘|독무덤|돌덧널무덤|회곽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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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면적 | 10,716㎡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금릉동 277-1[충원대로 724] |
소유자 | 충주세무서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금릉동에 있는 구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덤과 구덩 유구.
[위치]
금릉동 유적은 충주역에서 목행동 방면으로 가다가 나오는 청주세무서 자리에 위치한다. 해발 100m 정도의 구릉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이어진 능선의 북쪽 부분에 분포한다. 낮은 구릉 서쪽으로 칠금동 앞뜰이 넓게 펼쳐져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1998년 충주시 문화유적분포지도 제작을 위한 지표 조사 과정에서 고토양층 및 여러면 석기·몸돌·격지 등이 수습되어 충주 금릉동 유물산포지로 알려졌다. 2004년 충주세무서 건설부지에 해당되어 시굴 조사로 여러 시기의 유구가 확인됨에 따라 다시 정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구석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 210기가 확인되었다. 구석기시대 유물층을 포함하여 원삼국시대 토광묘 149기와 독무덤 1기, 조선시대 무덤 54기 등 시대별로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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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동 유적 조사 현황
[형태]
발굴 조사에서 주목된 점은 무덤이 입지한 방향이다. 원삼국시대 토광묘의 경우 등고선 방향으로 전 지역에 고루 나타났으며,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덤의 경우 등고선과 직교하는 형태를 보였다. 초기철기시대의 유구는 토광묘와 구덩 유구가 각각 1기씩 확인되었다. 보고자는 이 유구들의 시기를 B.C. 3세기 중반대로 편년하였다.
원삼국시대의 유구는 토광묘 149기와 독무덤 1기가 확인되었다. 토광묘는 가장 많이 조사된 유구로 합장묘 13기와 기둥구멍이 확인된 토광묘 5기가 포함되어 있다. 토광묘는 서로 중복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으며, 비교적 짧은 기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주구토광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기둥구멍이 있는 토광묘는 목곽묘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 보고자는 목곽계 목관묘로 구분하였다.
고려시대의 유구는 돌덧널무덤 2기가 확인되었다. 돌덧널무덤는 인근의 단월동 유적과 호암동 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교되며, 11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유구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은 17세기 이후의 친족 집단묘로 추정되며, 순수 토광묘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
구석기시대의 문화층에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충주 인근에 널리 분포한 제4기 갱신세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긁개·주먹대패·홈날 연모가 출토되었다. 초기철기시대의 유구에서는 충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검은간토기(높이 33.5㎝)와 원형 덧띠 토기(입지름 25㎝)가 출토되었다.
원삼국시대의 토광묘에서는 매우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토기는 240여 개체로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원저단경호] 93개체와 발형 토기 122개체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동시기 부장 유물의 일반적인 조합상을 보인다. 기타 특징적인 토기로는 복구연호(複口緣壺) 1점, 기마인물상 손잡이 달린 뚜껑항아리[파수부 유개호] 1점 등이 있다.
철기는 모두 227점으로 무기와 마구류, 농공구류 등이 대부분이다. 무기류는 서로 다른 제작 기법을 보이는 고리긴칼 2점과 쇠투겁창 8점, 쇠화살촉 21점 등이 있다. 특히, 마구류는 그 유입 시기를 종래 4세 이후로 편년하던 것을 3세기대로 올려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에서는 음각당초문청자대접·녹청자대접·토기병 등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의 분묘에서는 부장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출토된 상평통보 등은 무덤의 편년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의의와 평가]
금릉동 유적은 현재 청주세무서 신청사가 들어섬에 따라 대부분 파괴되었다. 금릉동 유적에서 두드러진 유구는 원삼국시대의 유구이다. 무덤 형태나 출토 유물은 남한강 상류에서 발견되던 원삼국시대의 유적과는 달리 천안·공주·청주 일대의 한반도 중서부 지역과 친연성을 보인다. 이후 백제의 영역 확대와 함께 충주의 고대사 전개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