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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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地圖 |
영어의미역 | Old Map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이 나타나 있는 조선시대 지도.
[개설]
고지도는 지도에 수록되는 지역의 규모에 따라 세계지도, 천하지도, 전국지도, 지방지도, 군현지도, 관방지도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전국지도는 한 장의 종이에 넓은 지역이 취급되어 있기 때문에 군현지도에 비해서 생활 공간의 내용이 적게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다른 전국지도에 비해서 『청구도(靑邱圖)』·『동여도(東輿圖)』·『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편이다.
군현지도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기본 단위였던 부(府)·목(牧)·군(郡)·현(縣)의 생활 공간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지방 관청인 관아가 중심에 위치하고, 주변에는 백성들이 모여 사는 촌락과 경지가 펼쳐져 있다. 읍치 중심에는 관아 외에도 향교와 같은 교육 기관과 생활 물자가 거래되는 장시도 다루고 있다.
전통시대에 농업 생산 활동은 촌락에서 이루어지고, 행정 업무나 장시를 통한 물자 교환은 읍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현지도에는 이러한 고을의 모습이 꽤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충주 지역과 관련된 고지도를 지도책에 포함된 지도, 읍지에 포함된 지도, 단독 지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도책에 포함된 지도]
1. 『호서전도(湖西全圖)』의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
『호서전도』에 수록된 충주목을 그린 지도로,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채색필사본으로 가로 15.8㎝, 세로 19.0㎝ 크기이다. 주요 산천을 그렸는데 산계의 표현은 연맥을 강조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주요 고개, 나루 등도 홍선의 도로망과 함께 표시하였다. 지도 중앙에 배치한 읍치에는 아사, 객사, 군기고 등의 관청 건물과 향교가 그려져 있다. 읍치 주변에는 각 면이 배치되어 있고 면보다 하부 단위인 리는 표시하지 않았다. 사찰·창고·서원·봉수를 파란 지붕의 가옥으로 표시하였는데, 특히 봉수는 일반적인 봉수의 표현과 상이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
『해동지도』에 수록된 충주목 지도이다. 일반적으로 1757년부터 1765년 사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1755년부터 1765년까지는 충주목이 충원현으로 강등되어 있던 시기이고,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충원현지도」와도 차이가 있음으로 1755년 이전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채색필사본으로 가로 47.5㎝, 세로 60.6㎝ 크기의 대형 지도이다. 「충주목지도」는 우측 상단에 ‘충주목’이라 쓰여 있으며, 중앙에 읍성을 배치하고, 산과 산맥, 고개, 강과 하천, 나루, 도로, 서원, 역, 창고, 향교, 사찰을 표시하였다. 이외에 도성의 주회, 민호, 곡물 총수, 군병 총수가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3. 『팔도지도(八道地圖)』의 「충주지도(忠州地圖)」
『팔도지도』에 수록된 충주목 지도이다. 연대·작자 미상의 군·현별 지도로 30리 간격의 동일한 지도 좌표에 표시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제작 연대는 서문에 기록된 무술년과 군·현의 명칭 변천을 기준으로 살펴볼 때, 1778년(정조 2) 또는 1838년(헌종 4) 중의 하나가 된다.
채색필사본으로 가로 21.7㎝, 세로 25.8㎝ 크기이다. 산과 산맥, 고개, 강과 하천, 도로, 봉수, 창고, 사찰, 서원, 역, 참, 원, 면명(面名)을 표시하였다. 그 중 모녀현·양마현·유현·성태양현·거리현 등의 고개와 월악산 등 25곳의 산, 대림산 봉수 등 4곳의 봉수, 동창·북창·남창·내창 등의 창고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대동여지도』의 「충주목부근도(忠州牧附近圖)」
1861년(철종 12)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의 충주목 부근 지도이다. 「충주목부근도」에는 읍치인 충주가 표시되어 있으며, 산과 산맥, 강과 하천, 도로를 표시한 바탕 위에 읍치, 성지(城池), 진보(鎭堡), 역참, 창고, 봉수, 능침(陵寢) 등을 표시하였다. 특히 도로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이수를 표시하였다. 산맥은 선의 굵기를 달리 하고, 톱니 모양의 형태로 표시하여 산맥의 대소를 가릴 수 있도록 하였다. 성심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동여지도』는 1985년 8월 9일 보물 제850호로 지정되었다.
[읍지에 포함된 지도]
1.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충원현지도(忠原縣地圖)」
『여지도서』는 1757년~1765년 사이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로, 총 55책이다. 『여지도서』는 각 읍의 첫머리에 읍별 지도를 수록하여 읍지 편찬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충원현지도」는 충주목이 1755년(영조 31) 심정연 옥사와 관련하여 1765년까지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던 1759년(영조 35) 당시 충주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우측 상단에 ‘충원현지도’라 쓰여 있으며, 흑백으로 산과 산맥, 강과 하천, 고개, 나루, 창고, 역, 서원, 면명을 표시하였다. 탄금대가 대문산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임오치, 심항(心項) 등의 명칭도 보인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2.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의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
1780년(정조 4) 제작된 『충청도읍지』 51책 중 충주목지(忠州牧誌)에 수록된 지도이다. 『충청도읍지』 충주목지의 첫머리 2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충주목지도」에는 흑백으로 산과 산맥, 강과 하천, 나루, 창고, 역, 봉수, 서원,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면명이 표시되어 있다. 나루는 하담진과 목계진이 표시되어 있고, 창고는 가흥창과 북창이 표시되어 있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인 1759년(영조 35) 제작된 『여지도서』의 「충원현지도」에 비하여 내용 면에서 빈약하고 정밀도 면에서도 많이 떨어진다. 면의 명칭은 전부 표기되어 있으나, 나루는 두 곳만 표시된 것으로 보아 상대적으로 이 두 곳의 나루가 중요했음을 보여 준다. 보련산(寶蓮山)이 보련산(保連山)으로, 달천(達川)이 달강(㺚江)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3. 『호서읍지(湖西邑誌)』의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
1870년(고종 7) 제작된 『호서읍지』 중 충주목지 맨 첫머리 2면에 걸쳐 수록된 지도이다. 「충주목지도」는 흑백으로 산과 산맥, 강과 하천, 나루, 역, 원, 사찰, 봉수, 서원,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 장시, 면명을 표시하였다. 『호서읍지』의 「충주목지도」는 내용 면에서 빈약하고 정밀도 면에서도 많이 떨어진다.
나루 중 달천진·금관진(金串津)·산계진·조돈진, 북진이 표시된 것은 당시 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고 중요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살미면의 신당장, 엄정면의 내창장, 이안면의 대소원장, 소파면의 한천장, 신석면의 용안역장, 금목면의 무극장 등 6개의 장이 표시되어 당시 교환 경제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4. 『충주군읍지(忠州郡邑誌)』의 「충주읍지도(忠州邑地圖)」
1899년(고종 36)경 제작된 『충주군읍지』에 수록된 충주읍의 지도이다. 『충주군읍지』 첫 부분에 접어 넣은 형태로 수록되어 있다. 흑백으로 산과 강을 개략적으로 그리고, 나루, 역, 원, 고개, 여단, 향교, 사직단, 충주읍성, 면명 등을 표시하였다. 이전의 충주 지역 지도에 비하여 내용도 빈약하고 정밀도도 많이 떨어진다.
면의 명칭은 두 글자로 통일되어 있다. 나루는 조돈진·북진·달천진·하담진·청룡진 등이 자세히 표기되어 있고, 장시로 내창장이 표시되어 있다. 충주읍성에 관찰부(觀察府)라 표기된 것은 1896년(고종 33) 전국을 13개 도로 개정한 후 충주가 충청북도의 관찰부가 되었을 때의 사실을 표기한 것이다.
[단독 지도]
「1872년작 충주목지도」는 1871년 열읍지도등상령(列邑地圖謄上令)에 따라 충청도 각 부·군·현에서 만들어 올린 충청도 지역 53장의 지도 중 한 장이다. 낱장의 필사채색본(筆寫彩色本)으로, 가로 63㎝, 세로 109㎝ 크기의 대형 지도이다. 전면 상단에는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라고 큰 글씨로 쓰여 있다. 난(欄) 외에는 각 방면의 경계와 이수(里數)를 표기하고, 난 안에는 산과 산맥, 하천과 강, 도로를 표시하였다.
산지는 봉우리를 이어 그려 맥을 강조하였다. 하천은 청색의 쌍선으로 그렸고 도로는 홍선으로 표시하였다. 오른쪽 상단에 군명(郡名), 왼쪽 상단에 건치연혁(建置沿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869년 신축된 충주읍성이 원 모양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4대문과 건물을 그림으로 표시하고 충주향교와 연원찰방역, 사찰, 봉수를 표시하였다.
충주향교 옆에는 당시 생원,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공부하고 정치를 논했던 사마소(司馬所)도 그려져 있는데 다른 군현지도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붉은 원점을 표시하고 사창(社倉), 서원(書院), 발참(撥站)과 역(驛), 점(店: 옹기점)을 표시하였다. 정구(鄭逑)를 배향한 운곡서원, 김세필(金世弼)·노수신(盧守愼) 등을 배향한 팔봉서원이 전면적인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는 1871년 훼철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임경업 장군을 배향한 충렬사(忠烈祠)는 훼철되지 않고 남아 있다.
내창장(內倉場)·용안장(龍安場)·신당장(新塘場) 등을 비롯한 장시와 장호원점(長湖院店)·곤지암점(昆池岩店)·신주막점(新酒幕店) 등의 점막이 표시되어 당시 상업적 양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866년(고종 3) 각 읍에서 사창을 설치하여 면의 사수(社首) 1인을 정하여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 사실도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사창은 관내 15군데에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증강된 포군이 번을 서던 포수청(砲手廳)도 그려져 있다.
작은 네모 안에 덕산(德山)·살미(乷味)·감물(甘勿)·율지(栗枝)·불정(佛頂)·소파(蘇坡)·사이(沙伊)·주류(周柳)·신석(薪石)·신니(申尼)·덕면(德面)·금목(金目)·맹동(孟洞)·소탄(所呑)·대조(大鳥)·사다(沙多)·천기(川歧)·지내(枝內)·법왕(法旺)·두의(豆衣)·생동(笙洞)·감미(甘味)·거곡(居谷)·복성(福城)·노은(老隱)·가흥(可興)·앙암(仰岩)·소태(蘇台)·엄정(嚴政)·산척(山尺)·김생(金生)·가차(加次)·동량(東良)·유등(柳等)·이안(利安)·금천(金遷)·남변(南邊)·북변(北邊) 등 38개 면의 면명을 표기하고 그 밑에 관청으로부터 거리, 동리, 면당 편호와 남녀 인구를 기록하였다.
「1872년작 충주목지도」는 지금까지 충주를 묘사한 지도 중 가장 세밀한 것으로 충주목의 전체 상황과 충주읍성 및 관아 건물의 배치가 자세하고 특히 심항산 봉수의 정확한 위치와 금봉산의 한미산성(韓美山城) 등이 표시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