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2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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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의미역 | Costum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경옥 |
[정의]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일반 복식 생활.
[개설]
옷은 사람들이 추위나 더위를 피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원시시대에는 짐승 가죽이나 나무의 잎새나 줄기를 엮어서 간단히 몸을 가렸지만, 문명의 발달로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게 되었고 나중에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넘어 예절이나 신분에 따라 모양·옷감·색깔 등이 달라졌다. 또한 보통 때 입는 평상복과 의식 때 입는 옷이 달랐다. 예를 들면 돌옷, 관례 때 입는 관례복, 혼례 때 입는 혼례복, 장례 때 입는 상복,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수의(壽衣)가 있으며, 이러한 의례복은 신분에 따라, 시대에 따라 모양이 달랐다.
[변천]
의생활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조선·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바뀌었다. 우리 옷은 북방계 복식권에 포함된 상의하고(上衣下袴: 윗옷과 바지)를 기본으로 하는 분할형 양식이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 초원 지대에 살았던 기마 유목민의 복장으로 추운 날씨와 유목 생활에 맞는 실용적인 형태이다. 고대 의생활은 문헌에서 찾을 길은 없고 벽화나 옛 그림에서 그 특성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 사람들은 비단과 전(氈: 털로 짠 모직물)을 옷감으로 사용했으며 구술 같은 것을 좋아하여 옷에 장식을 하고 목걸이·귀걸이를 사용한다. 남자는 의책(衣幘: 옷과 모자)을 갖추기를 즐겨 조정에 들 때나 왕을 배알할 때 반드시 옷을 갖추어 입고 모자를 썼다. 모자를 쓰는데도 문·무관이 서로 달라 문관은 귀를 길게 가려 쓰고 무관은 짧게 썼다.
삼한시대는 이미 마포(삼베)가 생산되었고 일찍부터 양잠에 눈을 떠 비단을 짜 입었다. 부여는 본래 흰 옷을 즐겨 입고, 외출할 때는 도돈에 초신을 신었다. 장군은 화려한 비단 옷에 금으로 장식한 관을 썼다. 고구려의 의복은 상하로 구분되고 남자는 바지·저고리,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깃(옷의 목을 둘러 앞에서 만나는 부분), 도련(두루마기나 저고리 자락의 끝 둘레)에는 강한 색선이 둘러져 있어 아늑해 보이는 동시에 입는 사람의 인품과 독창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백제는 고이왕 때 벼슬아치 품계를 16품으로 정하고 관모와 의대의 색깔 등으로 존비귀천을 가렸다. 1품에서 6품까지 관모에 은으로 만든 장식을 하고, 6품 이상은 보라색, 12품 이상은 붉은색, 16품 이상은 푸른색을 입었다. 띠의 색깔도 구분하여, 1품에서 7품까지는 자대(자주 띠), 8품은 조대(검은 띠), 9품은 적대(붉은 띠), 10품은 청대(푸른 띠), 11품·12품은 황대(노란 띠), 13품·14품·15품·16품은 백대(흰 띠)로 정하고, 관원은 평민을 구별하기 위하여 붉은 옷을 입었다.
신라시대는 성골·진골·육두품·오두품이라는 골품제도에 의해 의상·장신구·허리 띠·신발 심지어 빗도 계급에 따라 달랐다. 이때 마포 직조(삼베로 짠 것)가 발달하여 가장 높은 28승포에서 12승포 이하까지 옷감의 질도 달랐으며 일반 백성은 12승포 이하로 입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초기에 문·무관의 공복이나 문물이 당나라 제도와 가까웠는데 중간에는 원나라 제도로 바뀌어 왕실에서 군신에 이르기까지 의복·복실·예악·문물 등이 새롭게 바뀌기도 하였다.
1140년(인종 18)에는 왕의 제례복을 구류면류관(구슬에 꿰어 만들어진 술이 아홉 개 드리운 관), 칠장복(일곱 가지 모양이 그려진 옷)으로 정하고 시중 이상은 7류, 태상정 이상은 5류, 사인·감찰·어사 이하는 류(관에 드리운 구슬을 꿴 술)가 없는 관을 쓰게 했다. 왕은 상복으로는 오사모(검은 색실로 만든 모자)에 소매가 좁은 옷을 착용하였고, 종묘에 봉사할 때는 면류관과 장복을 입고 손에 국(옥패)을 들었고, 국사나 행사 때는 보라색 비단 공복에 옥대를 매고 손에 상아(패)를 들었다. 평소에는 검은 건에 흰 모시 도포를 입어 백성과 별 차이가 없었다.
여인의 옷은 남자와 비슷했다. 흰 모시 도포를 입고 밑에는 너른바지를 입고 분은 바르되 연지는 찍지 않았으며 버들잎 같은 눈썹은 그리지 않았다. 귀부인이나 평민이나 옷의 구별은 거의 없으며 가을·겨울에는 노랑 비단 치마를 즐겨 입었는데 귀부인은 주름이 많이 있는 치마를 즐겨 입었다.
조선시대 500년간은 외래의 간섭 없이 조선의 전통 복식이 형성되었다. 고려 말의 백저포(흰색 모시로 만든 포)에 세조 때 적삼 등이 나타났으며, 조선시대의 치마·저고리는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세련된 미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따라 옷의 모양이 달랐고 옷감도 달랐다. 양반들은 면·비단·모시같은 비교적 좋은 옷감의 옷을 입었지만 서민들은 그저 무명이나 베로 만든 옷을 지어 입었다. 양반들은 옷치레도 했지만 서민들은 옷치레가 없었다. 양반들은 색깔이 있는 옷을 입었지만 서민들은 색깔이 없는 흰 옷을 입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고도 한다.
[특징]
충주 지역의 의례복으로는 아기돌 때 입는 돌복, 혼인 때 입는 혼례복, 회갑 때 입는 회갑복, 상을 당하여 입는 상복, 마지막 가는 길에 입는 수의 등을 들 수 있으나 평상 시 주로 입고 생활하는 옷은 평상복이다. 평상복을 입고 생활하는 기간이 가장 많아 그 특징은 충주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충주 지역은 국토 중심지이고 문화의 중심권에 있어 그 의생활의 특징은 우리나라의 표준이 될 수도 있다.
옷은 남자 옷이나 여자 옷이나 아래옷과 웃옷으로 나뉘어져 있다. 남자 옷은 속적삼을 입고 그 위에 저고리를 입었고 아래는 속의를 입고 바지를 입는다. 바지는 흘러내리지 않게 허리띠를 매고 발에는 버선을 신고 댓님을 매었다. 여자 옷은 속에 속적삼과 저고리를 입지만 겨울에는 속적삼 위에 속저고리를 더 입는다. 아래에는 다리속곳바지, 단속곳치마를 입는데 양반이면 치맛자락을 왼쪽으로 여미고 서민층은 오른쪽으로 여몄다. 발에는 버선을 신었고 여자들은 머리에 장신구를 사용했다.
남자들은 외출 시 양반은 도포를 입고 서민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이나 모자를 쓰고 다녔다. 여자는 바깥 출입을 삼갔지만 부득이 나갈 때는 남녀가 유별하다 하여 양반 여자들은 쓰개치마를 머리에 쓰고 서민 여자들은 장옷을 머리에 썼다.
20세기 초부터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속옷 대신에 서양식 내복을 입게 되었으며 양복과 양장이 생활화되어 의례 때도 양복을 입었고 결혼·상례 때도 양복을 주로 입게 되었다. 또한 생활에 편리한 캐주얼 복장으로 등산·수영·운동 등을 할 때 각각 기능에 맞는 옷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명절이나 의례 등 특별한 모임 등에서는 전통 한복을 입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