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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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北民主民族靑年同盟 |
영어공식명칭 | Gyeongbug Democratic and National Youth Alliance |
이칭/별칭 |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맹부,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연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61년 3월 4일 -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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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61년 5월 -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 해산 |
최초 설립지 | 민주구국동지회 사무실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
성격 | 사회단체 |
[정의]
1961년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민주민족청년동맹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2일 부산에서 설립된 진보적 청년운동 단체이다.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이종률의 지도 아래 결성된 민주민족청년동맹은 자주적 통일과 진보적 민주 체제를 지향하는 청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지역 조직인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1961년 1월 7일에 발의되어 3월 4일 대구에서 창립 대회를 개최하였다.
[설립 목적]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자주적 평화통일 운동 확산과 통일 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고취시켜 범국민적 통일 운동 단체를 창립하기 위하여 결성하였다.
[변천]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1961년 1월 7일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에 있는 민주구국동지회 사무실에서 40명의 청년이 참가한 가운데 발의되어 3월 4일 창립 대회를 개최하였다.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위원장 서도원, 부위원장 박지수, 간사장 도예종, 부간사장 이대룡, 투쟁국장 강왕수, 연구위원장 정만진·김충섭 등 대구 지역 청년계의 중심인물로 구성되었다. 1961년 초 전개된 이대악법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의 최고 통치 기구였던 국가재최고건회의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특수반국가행위사건’으로 분류되어 중심인물들은 재판에 넘겨졌고 서도원은 징역 7년, 강왕수는 징역 5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후 서도원은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때 사형당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민족자결 원칙에 의한 자유선거로서 평화통일’을 구호로 내세웠다. 서도원은 1961년 1월 11일 『영남일보』에 반민주적 보수세력이 외세에 의존하여 조국 통일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청년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 도예종은 『영남일보』 1961년 1월 28일자에 실린 인터뷰에서 남북통일의 시급성을 강조하고, 남북통일이 8~12%까지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안이라 주장하였다.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1961년 2월 25일 대구역 광장에서 통일촉진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남북 문화 교류와 평화통일의 의미를 되새겼다. 1961년 3월 21일에는 이대악법반대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가 대구역 광장에서 주최한 이대악법반대운동에 참가하였다. 서도원은 “장면 정권은 자신의 부패와 무능을 은폐, 이대법을 제정하려 한다. 한국에도 미국의 매카시선풍이 예상된다”는 내용의 개회사를 하였다. 1961년 4월 7일에는 수성천 변에서 열린 이대악법반대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 주최의 이대악법반대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에 참가하였다. 이대악법반대대구궐기대회 및 횃불데모에서 강왕수는 “민주당은 선거공약을 이행하라”는 내용의 궐기사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 지역의 진보적 청년들로 구성된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청년 세력의 자주적 평화통일 운동의 구심 역할과 이대악법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4·19혁명 시기 민주·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