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30 |
---|---|
한자 | 金馹孫 - |
영어공식명칭 | Kimilson Geomungo|Korean lute of Kim Il-Son |
이칭/별칭 | 탁영금,문비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신현정 |
제작 시기/일시 | 1490년 - 김일손 거문고 제작 추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8년 6월 16일 - 김일손 거문고 보물 제957호로 지정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6월 29일 - 김일손 거문고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장처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 |
성격 | 유형문화재 |
재질 | 오동나무 |
크기(높이,길이,너비) | 높이 10㎝|길이 160㎝|너비 19㎝ |
소유자 | 김상인 |
관리자 | 국립대구박물관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전기 학자 김일손이 사용하던 거문고.
[개설]
김일손 거문고는 조선 전기의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사용하던 거문고이다. 1988년 6월 16일 보물 제957호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현재 김일손의 후손 김상인이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에 기탁하여 관리되고 있다.
김일손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에서 태어나 열곱 살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후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에게서 사사하였다. 1486년(성종 17)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식년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에 나아간 후 젊은 나이에 북경을 두 번이나 다녀오기도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와 연관되어 대역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경상북도 청도군에 있는 자계서원(紫溪書院)과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었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김일손은 『탁영집』 권4 「금가명(琴架銘)」에서 “거문고는 내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니 걸어 두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소리 때문이 아니다[琴者 禁吾心也 架以尊 非爲音也]”라고 하였다.
[형태]
김일손 거문고는 높이 10㎝, 길이 160㎝, 너비 19㎝이며 오동나무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거문고의 머리 부분인 용두(龍頭)에는 학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 부분에는 ‘탁영금(濯纓琴)’이라는 한자가 오목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줄을 얹어 고정시키는 운족(雲足)[현악기의 아래를 괴기 위하여 몸체 아래쪽 밑에 붙이는 구름 모양의 다리]과 용두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봉미(鳳尾)[거문고의 줄을 붙들어 매는 꼬리 부분]와 괘 등 일부는 새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거문고의 전면에는 김일손이 쓰던 거문고임을 밝히는 옥강(玉岡)이라는 선비의 글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김일손의 글씨로 보이는 시가 있다.
[특징]
김일손 거문고는 좋은 거문고를 갖고 싶어 하던 김일손이 한 노파에게서 얻은 오동나무 대문 문짝으로 제작하였다 하여 ‘문비금(門扉琴)’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짝으로 만들었기에 아직 못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에 제작된 거문고는 국내외 박물관 및 문화재 관련 기관에 약 20여 점이 소장되어 있고, 그 밖에도 문중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도 있다. 김일손 거문고는 1490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이며, 선비가 사용하던 악기로는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