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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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達城 古墳群 出土 遺物 一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내당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병섭 |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과 내당동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달성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일괄.
[개설]
대구 달성 고분군(大邱 達城 古墳群)은 달성(達城)에서 시작하여 서쪽 와룡산(臥龍山) 방면으로 연결되는 구릉에 조성된 고분군인데, 모두 일곱 개의 무리로 나누어진다. 지금은 파괴되어 거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지만, 일제강점기에 봉분이 있는 것만 87기가 확인되었다. 봉분 중에서 34호 2덧널, 37호, 50호, 51호, 55호, 59호, 61호가 1937년 처음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이후 1998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비산동 200-82번지 일원, 1999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비산4동 202-1번지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현황]
대구 달성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금속 유물로 나눌 수 있다. 토기는 뚜껑[蓋], 굽다리접시[高杯], 뚜껑달린굽접시[有蓋高杯], 굽다리바리[臺附鉢],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굽다리곧선입항아리[臺附直口壺], 짧은목항아리[短頸壺], 뚜껑달린귀항아리[有蓋耳附壺], 귀항아리[耳附壺], 단지[甕], 뚜껑달린손잡이사발[有蓋把手附碗], 손잡이바리[把手附鉢], 뚜껑달린바리[有蓋鉢], 사발[碗], 원통형그릇받침[筒形器臺], 시루, 이형토기(異形土器) 등이며, 전형적인 신라 양식의 유물이다.
금속 유물은 목걸이[頸飾], 가는귀걸이[細鐶耳飾], 굵은귀걸이[太鐶耳飾], 허리띠장식[銙帶金具], 금동 장식구(金銅裝飾具), 은제 장식구(銀製 裝飾具), 금동관(金銅冠), 금동 신발[金銅飾履] 등의 장신구류와 장식대도(裝飾大刀), 삼엽형환두대도(三葉形環頭大刀), 장식손칼[裝飾刀子], 금동 고리자루[金銅環頭], 투겁창[鐵鉾], 미늘쇠[有刺利器], 가지창, 쇠화살촉[鐵鏃] 등 무구류, 재갈[馬銜], 발걸이[鐙子], 말띠드리개[杏葉], 말띠꾸미개[雲珠], 안장틀 장식[鞍橋] 등의 마구류이다. 주목되는 것은 다양하게 확인되는 금은공품(金銀工品)이다. 금공품은 금동관, 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 금동 신발, 금동제 귀걸이 등의 장신구류와 금동 고리자루, 금동 장식대도, 금동 팔뚝가리개[金銅肱甲] 등의 무구류, 금동 말띠꾸미개, 금동 말띠드리개, 금동 안장틀 장식 등의 마구류에서 확인되며, 은공품은 은허리띠[銀製銙帶], 은허리띠 장식 등의 장신구류와 은제삼엽형환두대도 등 무구류에서 확인된다.
금공품이 다량으로 확인된 37호, 50호, 51호, 55호 봉분은 능선의 정상부에 열을 지어 조영된 대형 봉분이며, 가장 높은 지위를 지닌 고분으로 판단된다. 출토된 금공품은 대부분 경주 지역에서 제작된 것인데, 신라의 왕릉 부장품 다음가는 위세품이다. 출토된 토기와 마구 등이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冢) 남분과 북분 부장품과 유사한 점에서 5세기 중반에서 5세기 후반이 중심 시기로 보이며, 대구분지(大邱盆地) 중심 지배자 집단의 고분군에 부장된 유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