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5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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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學校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대구광역시에 있는 중등교육기관.
[개항기(1899~1910)]
1. 대한제국기[1899~1904]
대구 지역에서 근대 학교가 설립된 시기는 1899년이며, 흥화학교 대구지교와 달성학교가 세워졌다. 두 학교 모두 관민이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로, 중등교육을 실시하였다.
대구 지역에서 처음 세워진 근대 학교는 흥화학교 대구지교이다. 1899년 6월 최처규는 ‘신진개도(新進開道)’를 내세우며 전 장교청(將校廳)을 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고, 학생 40여 명을 선발하여 영어·산술·지지·역사 등을 가르쳤다. 흥화학교는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을 지향하였다.
독립협회는 민중의 지식을 개발하고 민권을 성장시켜야 국가 경쟁과 민족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교육 보급·『독립신문』 발간·만민공동회와 같은 민회 운동을 전개하여 민중을 계몽하여야 했다. 따라서 독립협회에서는 서울에 흥화학교를 세우고 각 지방에 흥화학교 지교를 설립하였으며, 대구에서도 흥화학교 지교가 설립되었다. 1911년 서울 흥화학교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흥화학교 대구지교도 이 무렵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7월 「중학교 관제」에 따라 경북관찰부 감영 안 관청 건물에서 달성학교가 개교하였다. 윤필오·장규원·추교정 등 10인이 발기하였고, 초대 교장은 경상관찰사 김직현, 부교장은 장규현[1900년 10월부터 윤필오]이었다. 명예 교사로 아라타니, 명예 고문으로 히자쓰키가 임명되었다. 주로 국한문, 지지, 산술, 일어 등을 가르쳤다. 심상과는 1905년 8월 27일 대구보통학교로 인계되었고, 고등과는 1909년 3월 8일 협성학교로 개칭되었다. 달성학교는 일어 학교로, 일본 거류민 히자쓰키가 설립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대구 지역에 정착한 개신교 계열은 대구 지역의 근대 학교 설립과 교육 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99년 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James Edward Adams)[안의와(安義窩), 1867~1929] 목사는 1900년 11월에 교회 내에 대남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2년 부해리(傅海利)[Henry Munro Bruen, 1874~1959] 선교사의 부인 부마태(傅馬太)[Mrs Martha Scott Bruen]는 장인차(張仁車)[Woodbridge O. Johnson M.D.] 선교사의 부인 파커(Edith M. Parker)가 운영하였던 바느질반 소년 14명을 인수하여 대구 선교지부(Daegu mission center)에서 신명여자소학교[신명학교]를 세웠다. 대남학교와 신명여자소학교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독교 계열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1906년 5월 아담스 목사는 교회 내에 중등 교육기관인 계성학교를 설립하고 신입생 27명을 받았다. 1907년 10월 부마태는 동산선교기지에 중등 교육기관인 신명학교를 설립하였다. 1913년 3월 아담스 목사는 남자성경반과 부인성경반을 통합하여 대구성경학교를 설립하였다. 1914년 5월 경비가 부족하여 학교를 유지하기 어렵자,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여성 독지가인 서희원과 김울산의 후원을 받아 학교명을 대남보통학교는 희원학교로, 신명보통학교는 순도여자학교로 개칭하였다. 1921년 10월 교회 내에 대구 최초로 대남유치원이 설립되었다. 1926년 7월 희원학교와 순도여자학교를 합병하여 희도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2.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
대구의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은 대구광문사·대구광학회 같은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설립되면서 본격화하였다. 이들 단체와 회원들은 교육을 보급하여 민지를 개발하고, 민기를 진작함으로써 자치·자강을 이룩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계명단체가 주도한 교육운동에 동참하였던 인사나 지역 유지들이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1906년 10월 대구 유지들이 대구사범강습소를 세웠다. 1907년 8월 서상하는 협성학교를 설립하였다. 애국계몽운동기의 대다수 학교는 사립 중등 교육기관이었지만, 1909년에는 공립 농림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일본의 교육정책 목표는 한인을 ‘충량한 제국 신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 일본은 네 번에 걸쳐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한인을 일본의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도구로 길러내고자 하였다. 제1차 「조선교육령」[1911]에서는 보통교육[현 초등교육] 수업연한 축소, 보통교육과 기술교육[실업학교, 전문학교] 위주의 학제 편성, 대학 교육 불허 등 교육 기회를 축소하고 한인의 우민화 교육을 시행하였다.
한편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실업학교·사립학교 등의 교육 규칙과 학교 관제 등이 공포되면서 한인 교육의 주도권을 한인이 아닌 일본이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일제의 식민정책에 필요한 도구로 실업교육 관련 중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의 현황을 살펴보면, 공립에는 대구중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고등여자보통학교·대구상업학교·대구사범학교·대구농림학교가 있었으며, 사립에는 계성학교·교남학교·협성학교 등이 있었다.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대구 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은 총 13개교였다. 공립에는 대구공립농림학교, 대구여자중학교, 경북공립중학교, 대구공립중학교, 대구공립상업학교, 대구사범학교, 대구공립공업중학교, 경북여자중학교, 대구여자상업학교 등 9개교, 사립에는 계성중학교, 대륜중학교, 오산농림실수학교, 대성중학교 총 4개가 있었다. 해방공간기에는 주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 중등 교육기관을 명칭을 변경하여 한국인 교육기관으로 편제하였다. 학제 역시 6-4-2~4-4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중등학교 내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분리는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46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가 개편되어 경북대학교 부속 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고등여학교는 대구여자중학교[현 대구일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중학교는 대구중학교, 1946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경북여자중학교, 1946년 오산불교학교는 능인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46년에는 영신중학교, 대건중학교, 1947년에는 영남중학교, 1949년에는 효성여자중학교가 신설되었다.
1940년대 후반 대구 지역에는 모두 19개의 중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대구 지역에서는 전국 최초로 이영식 목사가 특수교육기관으로 광명학교와 영화학교를 1946년에 설립·운영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49년까지 총 학교 수는 19개교, 학생 수는 3만 2000여 명, 교원 수는 600여 명이었다.
[1950년대]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법령 제86호]가 개정되어 1950년 3월 공포됨에 따라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6-3-3-4제로 확립되었다. 따라서 중등학교는 이 교육제도에 맞는 교과과정이 제정되어야 하였다.이에 따라 1950년 중등학교가 28개교였으나 1959년에는 63개교로 늘어났다. 중학교가 33개교로 학생 수 2만 3431명, 교원수 676명이었다. 고등학교는 30개교로 학생수 2만 3292명, 교원수 746명이었다.
[1960년대]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의 슬로건을 내걸고 인간 개조 운동을 교육에서 강조하였다. 이것은 1963년 2월 15일 교육과정의 전면 개편을 가져왔다. 또 1964년 도 단위 교육자치제가 부활하면서, 민족 중흥과 국가 발전을 위한 교육이 강조되었다. 특히 1968년에는 국민교육헌장의 선포, 1969년에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등이 실시되면서 중등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바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분리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1969년 말 대구 지역 중학교 현황을 보면, 중학교는 36개교, 교원 수는 1,198명, 학급 수는 902명, 학생 수는 5만 32명이었다.
[1970년대]
1970년대는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으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시기였다. 특히 중등교육 평준화가 시작되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중학생이 급증하였다. 이로 인하여 1972학년도에는 고등학교 입시가 더욱 심각해졌다. 일류 고등학교 입학 경쟁으로 인한 과열 과외와 재수생 문제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결국 1973년 2월 인문고등학교는 학군제, 과정별 지원, 추첨 배정으로 선발한다는 고교 입시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하였다. 대구는 인천·광주와 함께 1975년부터 적용되었다. 1970년 대구 역시 중학교 무시험제 실시로 중학교 지원 학생을 고등학교가 전원 수용하여야 했다. 신설 학교가 부족하여 학급당 수용 인원이 평균 61~70명이었고, 고등학생을 전원 수용하지 못하여 1979년에는 고등학교 재수생이 약 4,000명에 이르렀다. 1979년 대구의 중학교 현황을 보면, 중학교 43개교, 교원 수 1,809명, 학급 수 1,290개, 학생 수 8만 8269명이었다. 1969년과 비교해 보면, 중학생 수는 3만 3237명이 증가하였다. 대구시 인구가 100만에서 160만으로 증가한 것과 비교하여 보면 중학교 진학률이 크게 높아졌다.
[1980년대, 1990년대]
1980년 7월 30일 학교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법안 등을 포함한 7·30교육개혁 조치가 시행되면서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전면 개정 작업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 대구 지역 교육 현황을 보면 중학교 49개교, 교원수 2,127명, 학급 수 1,519개, 학생 수 10만 4784명이었다. 1991년에는 중학교 75개교, 교원 수 4,178명, 학급 수 2,333개, 학생수 12만 2518명이었다. 대구직할시교육위원회 발족 이래로 교육 여건 개선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한 결과 학급당 교원 수는 1.79명이고, 학급당 수용 인원은 50.6명이었다.
[현황]
2021년 현재 중학교는 국립 1개교, 공립 89개교, 사립 34개교로 124개교가 있다. 지역별로 보면 남구 7개교[공립 4, 사립 3], 달서구 29개교[공립 21, 사립 8], 동구 12개교[공립 9, 사립 3], 북구 23개교[공립 20, 사립 3], 서구 10개교[공립 9, 사립 1], 수성구 23개교[공립 14, 사립 9], 중구 5개교[국립 1, 공립 1, 사립 3], 달성군 17개교[공립 13, 사립 4]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