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5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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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生活 |
영어공식명칭 | Cloth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심도희 |
[정의]
대구광역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입었던 옷이나 의복과 관련된 생활.
[개설]
의생활(衣生活)은 각 시대의 사회와 정치, 경제,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고대에는 원시적인 의생활을 하다가 점차로 천연섬유를 직조한 의복을 입게 되었다. 대구 지역의 사람들이 평소에 입었던 일상복과 관혼상제를 행할 때 입었던 의례복을 통하여 대구의 의생활을 알 수 있다. 대구광역시는 신라시대 때부터 섬유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마에서 면, 모, 견 등의 천연섬유에서 나일론, 아크릴, 폴리에스터 등의 합성섬유로 발달하였다.
[일상복]
의생활은 고대로부터 사회적 신분과 지위, 경제력 등을 반영한다. 의복은 주로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었지만,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대구 지역에서 사람들이 평소에 입었던 일상복은 한복 위주의 전통의상과 양복 위주의 현대 의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의상은 저고리[襦]·바지[袴]·치마[裳]·겉옷[袍]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서구의 옷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까지 대구에서 한복과 양복은 공존하였다. 1930년대 약령시 풍경을 보면, 흰 옥양목의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남성들과 양복을 입고 중절모자를 쓴 남성들이 섞여 있다. 남자들은 두루마기 대신에 양복처럼 마고자와 조끼만 걸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엔 몸빼가 보급되었고, 광복 후 정부 차원의 ‘간소화 입기 운동’으로 한복은 생활복에서 점차 밀려났다. 1960년대는 월남치마가 유행하였고, 당시 여성들은 벨벳치마에 양단 저고리를 갖추는 것을 최고의 사치로 여겼다. 1970년대 들어서면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대구가 발전하고 양복이 완전히 자리 잡는다. 여성들은 남성복 패턴으로 만든 코트와 자켓을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통이 넓거나 밑단이 넓어지는 바지 또는 청바지가 유행하였다. 한복은 특별한 날에 입는 옷이 되었고, 한복도 레이스와 오간자, 날염 실크, 벨벳, 양단 등의 다양한 옷감이 사용되면서 화려해졌다. 1980년대 이후 섬유산업이 발달하고 기성복 시장이 확대되면서 옷의 소재와 디자인도 다양해졌고, 대구의 패션이 해외 컬렉션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패션은 개성과 자유를 표현하는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였던 시기로 20세기에 유행하였던 거의 모든 스타일이 재유행하였고,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에콜로지패션이 등장하였다.
[의례복]
의생활에서 의례복은 전통적으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행할 때 입었다. 관례는 어린아이가 성인이 됨을 축하하는 날이다. 남자는 머리에 상투를 틀어 올린 후 위에 관을 씌우고, 여자는 머리를 말아서 비녀를 꽂는 의식으로 대구 지역의 양반가에서 행하였다. 혼례는 가장 경사스러운 의례이다. 그래서 신분의 구별이 엄격한 조선시대에도 혼례에는 일반 서민들이 궁중 예복을 착용할 수 있었다. 대구 지역에서 신랑은 평상시와 같이 바지저고리를 착용하고 위에 관리의 복식인 청색 단령(團領)을 입었고, 신부는 청색 저고리와 홍색 치마를 입고 원삼 족두리에 이마와 볼에 연지를 찍었다. 사례(四禮) 중 가장 절차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상례이다. 상례는 망자를 애도하는 행위이다. 남자 상복은 중의(中衣) 위에 굵고 거친 생포를 사용한 최의(衰衣)와 최상(衰裳)을 입고, 두건 위에 굴건(屈巾)을 쓰고 수질(首絰)을 둘렀으며, 교대 위에 요질(腰絰)을 매었다. 여자 상복으로는 넓은 소매에 긴 치마[大袖長裙]를 입었으며 흰 족두리를 쓰고 교대 위에 요질을 매었다. 전통 유교사상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를 더 중시하였고, 상례에 이어 제례로 이어진다. 제례에서 남자는 대개 복건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포로 바뀌면서 흑립이나 유건을 착용하였다. 여자의 경우는 대부분 흰색이나 옥색 치마저고리를 착용하였다. 대구의 달성서씨 집안에서는 제사에 여성 참여시 조상에게 사배례를 하며, 특히 새 며느리를 맞았을 때는 꼭 조상에게 고하였다고 한다. 1975년 「가정의례준칙」이 개정되면서 상복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한복의 경우에는 흑색 복장으로 하고, 왼쪽 흉부에 상장(喪章) 또는 흰 꽃을 달거나 두건을 쓰게 되었다. 대구는 현재 명절의 차례, 기일제사, 묘제가 일반화된 제례이다. 하지만 이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증가하고 있다.
[섬유산업의 발달]
의생활에 있어서 섬유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구는 삼한시대부터 섬유작물의 재배와 직물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이다. 대구에서 신종 면화를 처음으로 시험 재배한 것은 1906년 서상돈의 후원으로 일본인이 설립한 부식원(富植園) 농장에서 재배한 것이다. 이후 대구는 농지가 대지로 바뀌면서 면화 생산은 쇠퇴하고 면화 집산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15년 전국 최초의 방직공장인 동양염직소가 인교동에 설립되었고, 동양염직소가 생사를 족답기에 넣어 명주를 생산하여 냄으로써 대구 섬유업계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 후 직물 농장이 늘어나고 일본 상품이 들어오면서 대구에 포목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포목상은 광복 후 서문시장으로 옮겨졌다. 1930년대는 대구·경북 지역에 양잠 농가가 많아지면서 대구는 조선 제일의 제사업 도시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자본과 생산의 규모에서 조선인보다 일본인의 공장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광복 이후 대구는 6·25전쟁을 계기로 메리야스 산업의 전성기를 맞았고, 전국 최대의 ‘섬유도시’가 되었다. 1954년 침산동에 제일모직이 설립되어 우리나라 양복지 시장의 40%의 점유율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1957년 동구 신천동에서 이원방이 한국 나일론 공장을 설립하였고, 나일론사를 가공하여 촉감을 부드럽게 한 스트레치 가공법으로 나일론 양말의 붐을 일으켰다. 이 때 부녀자들은 나일론 치마저고리를 입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1963년 중원상사가 홀치기 제품을 처음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는데, 대구에서는 홀치기를 부업으로 하는 부녀자들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대구 섬유업계는 폴리에스터 직물을 본격적으로 생산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는 대기업 섬유제품이 내수시장의 주류가 되었고, 대구의 섬유공업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저하되었다. 1985년 대구에 비산염색공단이 설립되었고, 제1회 대구섬유축제가 열렸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로 인하여 대구 섬유산업이 침체기를 겪었으나, 2000년대 들어 대구는 다시 첨단소재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하였다.
[현황]
의생활은 현대사회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대구광역시는 2000년대 들어 첨단소재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2년 국제섬유박람회가 개최되었고, 2013년 직물과 패션의 만남전, 2014년 대구패션페어 행사가 있었다. 미래의 의생활은 신섬유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의류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이퀄라이저 기기를 섬유에 부착하여 주변의 소리에 반응하는 의류가 등장하였고, 컬러 LED를 배열하여 동적인 글자와 그림 등을 통하여 착용자의 감성을 전달하는 의류도 제작되고 있다. 그리고 코코넛 열매, 대나무, 커피 원두 찌꺼기 등에서 추출한 바이오 소재 의류나 페트병을 재활용한 친환경 리사이클 의류 등이 시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