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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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鍾巖 軍資金 募金事件 |
이칭/별칭 | 경북 의열단 사건,이종암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종결 시기/일시 | 1925년 11월 5일 - 이종암 군자금 모금사건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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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장소 | 이종암 형 이종현 자택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성격 | 독립운동 |
관련 인물/단체 | 이종암|김원봉|고인덕|배중세|한봉인|의열단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 의열단원 이종암이 독립자금을 확보하다가 체포된 사건.
[개설]
이종암(李鍾巖)[1896~1930]은 1896년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백안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대구부 서상정으로 이사하였다. 이종암은 대구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농림학교, 부산상업학교에 연이어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제대로 내지 못하여 매번 중퇴하였다. 이종암은 대구공립보통학교 교장 엄성구(嚴星九)에게 영향을 받았다. 고모부인 대구은행장 정재학(鄭在學)의 도움으로 대구은행에 취직하였다. 1917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종암은 각기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 순국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종암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내 61에 있다. 이종암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역사적 배경]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이념이나 사상의 커다란 변화는 독립운동의 방략의 전환을 가져 왔다. 바로 ‘작탄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의열 투쟁, 독립군 편성 및 항일 무장 투쟁의 실행을 목표로 하는 군사 운동이 무장 독립운동의 대표적 방법으로 자리잡는다. 국내에서도 비밀 결사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의열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의열 투쟁의 대상은 주로 도청·경찰서·법원 등과 같은 식민 통치 기구,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식산은행 등과 같은 한국인 착취 기관이나 관변 조직, 일본 고위 관료, 친일파 등이었다. 의열단은 가장 활발히 의열 투쟁을 벌였던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이다. 의열단은 국내뿐 아니라 중국·일본에서 의열투쟁을 벌였고, 국내에서 독립자금[군자금]을 마련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려 하였다.
[경과]
이종암은 대구은행에 재직 중이던 1917년 12월 고객 예입금인 1만 911원 50전을 빼돌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종암은 광복회원 3명이 군자금 요청에 불응한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의 부호 장승원을 사살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종암은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에서 지인 구영필(具榮泌)에게 7,000원을 맡겨 비밀 결사 삼광상회(三光商會)를 개점, 경영하도록 하였다.
이종암은 1918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퉁화시[通化市]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학교[일명 신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흥학교가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고, 학생이 늘면서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무관학교 분교가 설립되었고, 이종암은 분교에서 속성 과정을 이수하고 제2기로 졸업하였다.
이종암은 1919년 11월 신철휴, 서상락, 한봉인, 이성우, 강세우, 한봉근, 김원봉, 곽재기, 윤소용, 김상윤, 배동선 등과 의열단을 설립하였다. 의열단이 국내 제1차 표적으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일보사를 정하자, 이종암은 빼돌린 군자금 3,000원을 폭탄 구입비와 여비로 내놓았다. 이종암이 준 돈으로 폭탄 3개, 13개분의 폭약 및 부속품, 권총 2점, 탄환 100발 등을 구입하였다. 1920년 최경학(崔敬鶴)이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종암은 국내로 잠입하지 않고 김원봉, 강세우와 함께 상하이[上海]에 머물렀다. 의열투쟁이 지지부진하던 가운데 1920년 6월 16일부터 이성우, 윤세주, 황상규, 김기득, 곽재기가 체포되고,1920년 7월 8일에는 경상남도 밀양군에 숨겨둔 폭탄 3개가 발각·압수되었다. 조선국민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구영필이 경기도경찰부 김태석 경부에 협력하여 벌어진 일이다. 이 상황을 몰랐던 김원봉은 1920년 7월 이종암에게 상황 파악과 실행 재촉의 임무를 주어 국내로 잠입하게 하였다. 이종암은 랴오닝성 단둥[丹東]에서 밀양 폭탄 압수 사건을 접하고, 부산에서 이수택을 만나 거사에 필요한 무기류를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이수택 역시 구영필의 회유에 넘어가 거부하였다. 결국 이종암은 김상윤, 서상락과 밀양군 초동면 야산의 농가에 숨어서 거사를 논의하고, 거사를 도모할 인물들을 모색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김상윤의 고향 친구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였다.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성공한 이후 이종암은 서울로 가 김한 등의 도움으로 서울 낙원동에 은신하였다. 1921년 12월 하순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여 의열단 본부에 합류하였다.
1922년 3월 상하이에서 오성륜, 김익상과 함께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衣一]를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오성륜·김익상은 체포되었지만, 이종암은 붙잡히지 않았다. 1923년 여름부터 남만주-서울-도쿄 3각 연계의 대규모 광역 거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의열단 본부에서는 단원들을 일본으로 특파하고, 폭탄 50개를 도쿄로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발생한 한국인 학살로 인하여 도쿄에 특파된 단원 다수도 피살되었다. 결국 계획의 일부를 수정하여 1924년 1월경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에 폭탄 300개로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3만 원의 비용을 국내에서 모금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이종암을 비롯한 11명이 특파단원으로 선발되었다. 이종암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영고탑 근처에 머물면서 확보한 폭탄 2개, 권총 1정, 탄환 50발, 「조선혁명선언」 등사본 100매를 휴대하고 1925년 7월 혼자 국내로 잠입했다. 이종암은 국내에서 독립자금 1만 원이 확보되면, 혼자 도쿄로 건너가 폭탄 거사를 감행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종암은 밀양으로 가서 김병환, 고인덕 등을 만나 자금 조달 방안을 논의하였다. 총기로 위협하거나 강제로 의연금을 모집하는 방법이 효과가 약하고 쉽게 발각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이종암은 포항의 어장 투자금 명목으로 경상남도 하동의 박종원에게 5,000원, 동지 배중세 소유의 수리사업권을 넘겨 주는 조건으로 경남은행 구포지정잠 김재수에게 5,000원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박종원은 약정일인 1925년 10월 15일까지 돈을 내지 않았다. 결국 1925년 11월 5일 각기병으로 경상북도 달성군 성서면 노곡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관문동] 이기양의 산장에서 은신하고 있던 이종암은 경북경찰부 고등과장 나리도미[成富文語] 경부를 비롯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고인덕, 배중세, 한봉인 등 11명이 체포되었다. 독립운동가에서 일본 밀정으로 전락한 구영필이 최계화로 개명하여 영고탑에 머물면서, 이종암의 활동을 경북경찰부에게 밀고함으로써 이종암과 의열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결과]
1925년 11월 5일 이종암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6년 12월 28일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살인, 대정 8년 제령 제7호의 죄목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1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종암은 고문 과정에서 얻은 후유증과 감옥의 열악한 환경으로 지병이었던 각기병에 결핵, 인후병, 위장병 등이 더하여져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결국 1930년 5월 19일 대전형무소에서 집행정지로 가출옥하여 대구부 남산정 친형 이종윤의 집에 머물렀으나 5월 20일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종암 군자금 모금사건은 1920년대 의열단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광범위하게 의열 투쟁을 벌이는 양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