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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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
[개설]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저항하며 국권을 수호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이다. 대구의 독립운동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항쟁과 계몽운동, 식민지시기 대중운동, 문화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항일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노선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식민지 이전 대구의 독립운동가]
식민지 이전 대구 사람들은 계몽운동과 의병항쟁을 펼쳤다. 1906년 대구광문사, 대구광학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고 북후정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으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하였다. 1909년 신민회의 청년학우회에 가담하여 비밀결사에 의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대구 사람들은 달성의 문석봉처럼 공주에서 을미의병을 주도하거나 대한제국의 대구 진위대 군인으로서 군대 해산 이후 산남의진에 합류한 우재룡처럼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10년대 대구의 독립운동가]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 이후 독립을 쟁취하여 자주를 회복하고, 세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식민지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 비밀결사단체인 재건 달성친목회[일명 조선국권회복단]와 광복회 운동을 전개하였고 1916년 대구권총사건을 일으켰다. 또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전민족적 항일운동인 3·1운동을 폭발시켰다. 3월 10월 덕산동 동문시장 만세시위, 3월 30일 동화사지방학림의 덕산동 동문시장 만세 시위, 4월 15일 대명동 만세 시위, 4월 26일 팔공산 미대동 만세 시위가 그것이다. 또한 비밀결사 혜성단을 통해 철시 투쟁과 격문 투쟁을 펼쳤다. 그리고 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여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같은 국외 세력과 연계된 독립운동 자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대구의 독립운동가]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1920년대 청년운동·여성운동·노농운동·형평운동 등의 대중운동과 사회운동, 이종암 사건과 조선식산은행 폭탄 사건과 같은 의열투쟁, 대구 학생운동 비밀결사와 대구고보폭압반대동맹과 같은 학생운동, ㄱ당과 허무당과 같은 폭력투쟁, 진우연맹과 같은 무정부주의 운동, 민족협동전선의 신간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40년대 대구의 독립운동가]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1930년대 일본의 만주 침략을 반대하는 반전·반제 격문 투쟁을 벌였다. 조선공산주의자 협의회, 대구노동자협의회와 같은 혁명적 대중운동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사회과학연구회, 대구상업학교, 대구사범학교 등의 비밀결사 운동을 펼쳤다. 일제 말기에는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무우원과 같은 비밀결사 운동을 일으켰다. 아울러 대구 24부대 탈출, 대구신사 방화, 단파방송 청취,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조직 등의 활동을 통하여 일제의 전쟁정책에 반대하고, 건국을 준비하였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의 운동과 사건을 일으켜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대구가 아니어도 경북·서울 등지에서, 나아가 중국·일본·러시아·미주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일제의 패망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