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96
한자 徐沈
영어공식명칭 Seo Chim
이칭/별칭 성묵(聖默),구계(龜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서침 연산도호부사 부임
추모 시기/일시 1665년 - 서침 숭현사에 배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 서침 이건한 구암서원에 배향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단소 서침 묘소 - 대구광역시 팔공산 중심동 간좌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구암서원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연암공원 내]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달성(達城)
대표 관직 연산도호부사|영해부사

[정의]

조선 전기 대구 출신의 문관.

[가계]

서침(徐沈)[?~?]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자는 성묵(聖默), 호는 구계(龜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도관좌랑을 지낸 서기준(徐奇俊)이고, 할아버지는 서영(徐穎)이다. 아버지는 정당문학 서균형(徐均衡)이고, 어머니는 김광리(金光利)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활동 사항]

서침은 대구에서 태어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여말 선초의 변혁기에 향리인 달성(達城)[현 달성공원 일대]에 은거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1424년(세종 6) 달성은 지형이 자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고 있어서 군대의 훈련 등 군사 요새를 구축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세거지를 달성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하고 보상책을 논의하였다. 서침은 일체의 보상을 사양하는 대신에 고을 백성들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씩 감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서침의 성의를 가상히 여겨 이를 허락하고 특별히 연신지(蓮信池)[현 영선시장 자리], 신지(新池)[현 서문시장 자리] 일대의 토지에 대한 조세 수취권과 더불어 남산고역(南山古驛)[전 남산병원 일대]과 동산(東山)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 관리로 특채하였다.

서침은 1433년 연산도호부사로 부임하였고, 이후 갑산군수·첨지중추원사·영해부사·삼남균전제처사(三南均田制處使)를 역임하였다.

[묘소]

서침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서침은 1665년(현종 6) 구암서원(龜巖書院) 숭현사(崇賢祠)에 배향되었다. 구암서원은 1991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에 이전하여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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