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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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鳳安 |
영어공식명칭 | Kim Bongan |
이칭/별칭 | 김봉안(金奉安),김정수(金正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 김봉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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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김봉안 대구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 김봉안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봉안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김천 송천리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
거주|이주지 | 남산정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봉안(金鳳安)[1895~1959]은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남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다가 1919년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김봉안(金奉安)·김정수(金正秀)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였던 백남채(白南採)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1918년 3월 8일 오후가 되자 서문시장 주변에 만세운동 관련자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7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이만집의 연설이 끝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는 서문시장을 나서서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이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김봉안도 이때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으며,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봉안은 1959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봉안의 공적을 기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