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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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萬集 |
영어공식명칭 | Lee Manjip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7월 7일 - 이만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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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0년 - 이만집 개신교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이만집 계성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이만집 대구 남성정교회 제2대 장로 장립 |
수학 시기/일시 | 1917년 - 이만집 평양신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9월 - 이만집 남산교회 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월 - 이만집 남성정교회 목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9월 - 이만집 교남기독청년회 조직하고 회장 선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이만집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이만집 조선예수교 봉산교회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6월 8일 - 이만집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이만집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호명리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 |
학교|수학지 | 평양신학교 - 북한 평양특별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종교인|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계성학교 교사|남산교회 목사|남성정교회 목사|교남기독청년회 회장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이만집(李萬集)[1876~1944]은 대구 남성정교회 목사로 재임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가계]
이만집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이원채(李源彩)이고, 어머니는 손숙명(孫淑明)이다. 아들은 이광세·이성해로 모두 목사이다.
[활동 사항]
이만집은 1876년 7월 7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에서 태어났다. 1900년 경주에서 대구 남성정교회 목사 안의와(安義窩)[James Edward Adams, 1867~1929]의 선교로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5월에 계성학교가 세워지자 교사로 부임하여 한문을 가르쳤으며, 1909년 대구 남성정교회 제2대 장로가 되었다. 1912년 순회 조사(助事) 자격으로 부해리(傅海利)[Henry M. Bruen] 선교사와 경상북도 일대를 다니면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평양신학교 재학 중에 대구에 남산교회를 설립하고 부해리 선교사와 사역하였다. 191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6월에 제2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장립을 받았으며, 1917년 9월 남산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18년 1월에는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가 되었고, 9월에 대구 지역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의 발기로 교남기독청년회[현 대구YMCA]를 조직하고 회장에 당선되었다.
이만집은 1919년 2월 24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대구 출신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3·1운동 동참을 권유받았다. 이에 이만집은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과 대구에서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2일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이 들고 온 「독립선언서」 200매를 전달받았다. 「독립선언서」는 남산교회 지하실과 김태련의 집, 계성학교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등사하였으며, 태극기 일부는 김태련의 집에서 제작하고 나머지는 학생들이 각자 제작하여 가지고 오기로 하였다. 거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서문시장에서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서문시장에서 이만집은 쌀가마로 만든 연단 위에 올라 독립 연설을 하였고, 김태련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날 시위에는 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 성경학교 학생 20여 명,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 명,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그 외에도 시장에 모인 군중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7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이만집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만집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만집은 1921년 1월 출소 후 남성정교회로 복직하였다. 1923년 3월부터는 자치운동을 시작하였d며, 1931년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였다. 1934년에는 금강산에 30정보의 땅을 마련하여 교역자를 위한 수양관 3동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만집의 공적을 기려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