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85
한자 鄭在淳
영어공식명칭 Jung Jaes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 5월 24일연표보기 - 정재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정재순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8년 5월 31일 - 정재순 기독교대구연합회 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44년 5월 - 정재순 대구기독교전시보국회 위원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48년 12월 18일연표보기 - 정재순 사망
출생지 대신동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종교인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종교인.

[개설]

정재순(鄭在淳)[1877~1948]은 1877년 5월 2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신정교회 목사로 봉직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행보를 보였다. 아들 정원조(鄭元祚)서문시장 만세 시위 때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활동 사항]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였던 백남채(白南採)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정재순을 비롯한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장로 정광순(鄭光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8일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정재순은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정재순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재순은 1938년 5월 31일 대구공회당에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을 이룩함”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대구연합회의 결성대회에서 한국인 위원 6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39년 12월 13일 대구 성경학교에서 “국민정신 총동원의 취지를 달성하고 전도보국의 실효를 거둘 목적”으로 열린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 지맹 결성식’에서 사회를 진행하면서 취지와 축도를 맡았고,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정재순은 1944년 5월 제일교회에서 결성된 대구기독교전시보국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8년 12월 1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재순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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