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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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潤德 |
영어공식명칭 | Kim Yundeo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중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윤덕(金潤德)[1888~1952]은 1888년 11월 1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태어났다. 한약상으로 일하던 1919년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구에서도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대구 성경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한 계성학교 학생들은 3월 9일에 학교와 서문시장 인근의 달성공원에서 2차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시위 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에 김윤덕은 계성학교 및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협의하여 3월 10일 덕산정[현 중구 덕산동 일대] 동문시장에서 2차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김윤덕 등은 3월 10일 오후 4시 30분 무렵 장꾼으로 가장한 채 동문시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김윤덕 등 시위 주동자들을 따라 열을 지어 행진하려 하자 대구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김윤덕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김윤덕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윤덕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3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윤덕의 공적을 기려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