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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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炳柱[東區] |
영어공식명칭 | Seo Byeongj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일대에서 세워진 해안수리조합 대표로 활동한 자본가.
[개설]
서병주는 일제 강점기 관료로서 대구 지역의 대지주이자 지역 유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대구 동구에 해안수리조합을 설립하였다.
[가계]
서병주(徐炳柱)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1885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
[활동 사항]
서병주는 1929년에는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에 연호제수리조합(蓮湖堤水利組合)을 설립한 바 있었다. 1931년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에 해안수리조합을 설립한 자본가였다. 해안수리조합의 관개 혜택 면적은 약 4.96㎢였다. 그러나 해안수리조합 설립 과정에서 지역농민의 해안수리조합설립반대운동에 부딪히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후반 해안수리조합은 동촌비행장 건설 부지로 편입되면서, 수리조합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서병주는 수리조합 설립 외에도 상공업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24년 조양무진주식회사(朝陽無盡株式會社), 1937년 경북상공주식회사(慶北商工株式會社), 1938년 경북무진주식회사(慶北無盡株式會社), 1939년 경북흥산주식회사(慶北興産株式會社) 등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였다.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23년 대구부의 협의원이 되었다. 1927년 대구학교 평의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친일 유림단체인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의 이사가 되었다. 영남명덕회는 1932년 10월 1일 도감, 부윤, 군수 및 진흥회 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유도진흥회의 명칭을 변경하고 결성된 단체였다. 1938년 11월 생산력의 확충, 다각적 영농 실행 등을 목표로 하는 경북지주생산보국회(慶北地主生産報國會)를 결성하였다. 친일반민족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3년과 1937년에 경상북도의 관선 도회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6월 3일부터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中樞院)의 참의가 되었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지냈다. 1940년 경상북도 도회 중국경제시찰단으로 활약하였다. 그즈음 대구지방법원 주최 창씨간담회에 참석하였다.
한편, 1940년 12월 인삼 암거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에서 「국가총동원법 위반 및 폭리행위취체규칙」 위반으로 징역 6개월, 벌금 3천 원의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재판 판결이 나기 전인 1940년 8월 3일에 경상북도 도회의원 및 중추원 참의 자리가 면직 처리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 경북지부를 찾아 자수하였다. 그 뒤 동인동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에게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56년 3월 18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서병주는 1913년 자신의 땅을 도로용지로 대구부[지금 대구광역시]에 기부하여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 1개를 받았으며, 1940년 일본적십자사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