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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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山戰鬪 |
이칭/별칭 | 공산성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927년[태조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고려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사이에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공산전투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영천 지방을 습격하고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핍박할 즈음에 위기를 느낀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한 데서 비롯된다. 태조 왕건은 곧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원군이 이르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하였다.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를 세워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하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태조 왕건은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경애왕을 조문하고,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桐藪)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한 후백제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경과]
고려군의 진행로는 대체로 팔공산의 서쪽 방면에서 동쪽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무태-연경을 지나 계속 동화전을 따라 동쪽으로 진행하여 지묘동과 미대동을 거친 것으로 보이며 백안동 또는 내학동 부근에서 후백제 선봉을 격파하여 능성 고개를 점하고 계속 영천 방면으로 진행하였을 것이다. 태조지라는 곳에서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였다. 고려군은 후퇴를 하게 되는데, 그 후퇴로는 대체로 그들이 진출하였던 길과 동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파군재라는 곳에서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났다.
참패를 한 왕건은 그 병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으로 보이며,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왕건의 도주로는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동화천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천변을 이용하거나, 또는 적대 세력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산기슭의 외곽을 이용하였는데, ‘앞산’ 지역에 이르러서도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왕건의 진행 방향으로 볼때 대체로 성서 지역을 거쳐 낙동강 강변을 따라 지금의 달성군 지역을 경유하여 성주역으로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성서에서 성주 방면 국도 30호선으로 진행하다 만나게 되는 달성군 다사면 매곡리에는 '왕선 고개' 또는 '왕쉰 고개'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왕선재는 원래 '왕이 쉬어간 고개'라고 해서 '왕쉰재'라고 불렀다. 즉 왕건은 이 고개를 넘어 성주의 선남 지역을 거쳐 간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장군 김락과 신숭겸 등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하였으며 태조도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공산전투를 시발로 두 나라의 대결은 첨예화되었다. 따라서 종래 표면상 유지되던 양국간의 평화는 깨어지고 무력 충돌이 심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견훤은 공산전투를 대승리로 장식하여 경상도 지역을 석권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성주와 칠곡으로 진출하여 고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견훤은 공산전투의 승리와 몇몇의 국지전에서 추가로 승리한 후 그해 12월에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활을 평양의 다락 위에 걸고 내가 총애하는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