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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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文老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Gu Munro |
이칭/별칭 | 흑면 장군(黑面將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건립 시기/일시 | 1926년 - 구문로 신도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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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구문로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 |
원소재지 | 구문로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 |
관련 인물 | 구문로 |
재질 | 화강석[기단]|오석[비신]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약 56㎝[가로]|158㎝[세로]|25.5㎝[두께] |
소유자 | 능성 구씨 대종회 |
관리자 | 능성 구씨 대종회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무신 구문로의 신도비.
[개설]
구문로(具文老)[?~?]는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뛰어났고, 용맹과 지략을 갖추었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1461년(세조 7)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와 평안도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에 겸직으로 임명되었다.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여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구문로는 궁마(弓馬)에 능숙하여 요동 지역에서 여진족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여진족은 구문로를 ‘흑면 장군(黑面將軍)’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는데, 구문로의 얼굴에 손바닥만 한 검은 사마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장이 8~9척이나 되었고, 체구가 건장하였다. 특히 활쏘기를 잘하여 세조가 사냥을 나갈 때 사대장(射隊長)으로 삼았다고 한다.
[건립 경위]
신도비는 아버지인 구서의 신도비와 함께 1926년에 세웠다. 효릉 참봉(孝陵參奉) 구연창(具然敞)이 문장을 짓고, 구자승(具滋昇)이 글씨를 썼다. 또한 권중하(權重夏)가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을 썼다.
[위치]
구문로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가교리 산80에 있다. 당진시 송악읍 소재지에서 남쪽 619호선 도로를 따라 순성 방면으로 약 4㎞쯤 가면 가교리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를 지나 가교 2리 마을회관 앞으로 들어가면 ‘영경재(永敬齋)’라는 제각이 있다. 신도비는 제각 뒤의 묘소 앞에 있다.
[형태]
구문로 신도비는 화강석 재질의 직사각형 기단 위에 오석으로 비신을 세웠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 약 56㎝, 세로 158㎝, 두께 25.5㎝이다. 비신 위에는 화강석 지붕돌을 올렸다. 지붕돌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03㎝이다.
[금석문]
구문로 신도비의 비명은 ‘가선대부 병사 구공 신도비명(嘉善大夫兵使具公神道碑銘)’이다. 신도비의 옆면과 뒷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구문로의 묘소 앞에 있는 묘비는 아버지인 구서의 묘비와 같이 중앙이 솟아오른 독특한 형태이다. 시기가 오래되어 글씨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식되었다. 신도비 아랫부분도은 많이 손상되어 글씨 확인이 안 되는 곳도 있다. 구서 신도비와 구문로 신도비는 같은 마을 안에서도 다른 곳에 있었다. 능성 구씨 신암 종중에서는 2003년 10월 구서를 중심으로 묘소와 신도비를 한곳으로 모으고 묘역을 정화하였으며, 음력 3월 3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