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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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영어공식명칭 | Modern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 당진 지역의 역사.
[개설]
을사늑약을 계기로 의병 항쟁이 발발하였던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 민족은 치열한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포악했던 일제 강점기도 결국 우리 민족의 독립 열기 앞에 무너져 내렸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해방 후의 진로는 열강에 의해 결정되었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국제 열강의 간섭과 함께 남북 분단과 군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정부라는 제1 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곧이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하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의 상흔은 너무 깊었고, 우리는 전쟁의 폐허 위에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충청남도 당진 지역 주민들도 해방의 기쁨을 뒤로 한 채, 재건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해방 직후의 당진 지역은 인민 위원회 활동이 오히려 활발하였다. 1946년 10월, ‘추수 봉기’라고 불리는 10월 항쟁도 충청남도에서는 당진·홍성·예산 봉기가 가장 심할 정도로 사회주의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경찰의 후퇴 과정에서 발생한 보도 연맹에 관련된 좌익 세력 학살과 공산화가 되면서 발생한 우익에 대한 학살, 그리고 경찰의 진입에 뒤이은 보복적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많은 좌익과 우익의 보복적 살인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은 주민 상호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겼다.
한국 전쟁의 후유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950년대 제1 공화국 체제하에서 당진 지역 주민들은 미국의 원조 경제의 그늘 속에 별다른 희망을 얻지 못했다. 다만 1949년에 이루어진 농지 개혁으로 자영농이 되었다는 기쁨 하나만으로, 농지 값인 상환곡을 매년 갚아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였다. 그러던 1957년 당진 지역에는 특별한 행정 구역 변동이 있었다. 서산군에 속했던 정미면과 대호지면이 당진군에 통합된 것이다. 원래 두 면은 당진군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당진군으로 통합 문제가 수시로 거론되곤 하였다. 하지만 전격적으로 진행된 이면에는 1958년의 국회 의원 선거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당진 지역 주민들이 변화의 물결을 경험한 것은 1970년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였다. 새마을 운동을 맡은 당진군청과 면사무소 공무원들은 수시로 담당 마을을 찾아 농민을 설득하여 공동체 활동에 참여시켰다. 주민들은 농촌 환경 정화 활동을 전개하여 농가를 개량하였고 농로를 확장하여 농기계가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은 소득 증대를 위해 공동의 작업장을 마련하였고 겨울철의 무료함을 소득을 위한 노동 활동으로 바꿨다. ‘개펄’이 광대했던 당진 지역 주민들은 제방을 쌓고 간척지를 조성하였으며, 굴 양식을 활성화하여 주민의 소득 증대를 위해 많은 노력을 다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의 준공은 당진 지역에 또 하나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역사적으로 비옥한 평야 지대를 보유했던 당진 지역이었지만, 대부분의 농지는 천수답이었다. 이러한 농토에 관개 사업을 시행하여 전천후 농지로 변화시킨 것이다. 또한 삽교천에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우평·강문 평야에 해수 범람도 사라지게 되었다. 방조제의 건설로 교통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당진읍내에서 예산군 신례원을 거쳐 온양에서 천안으로 돌아가던 서울 길이 바뀌었다. 삽교천 방조제를 통해 서울로 직접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세 시간 이상 걸리던 서울 길이 두 시간 이내로 줄었다. 교통의 발달은 주민 생활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그 후 2000년 11월 서해 대교의 준공과 2001년 12월 서해안 고속 도로의 완공으로 당진 지역은 웅비(雄飛)하는 ‘당찬 당진’으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정치]
충청남도 당진 지역은 1914년 4월 당진군[8개 면 130개 동리]과 면천군[22개 면 308개 동리]을 통폐합하여 당진군이라 하고 10개 면에 123개 동리로 구성되었다. 군청 소재지는 이배면 읍내리로 정했다. 10개면은 이배면(螭背面)·고대면(高大面)·석문면(石門面)·마암면(馬岩面)·송산면(松山面)·순성면(順城面)·범천면(泛川面)·합덕면(合德面)·송악면(松嶽面)·신평면(新平面) 등이다. 이 가운데 마암면이 1917년 10월 면천면(沔川面)으로 바뀌었고, 이배면은 1928년 당진면으로, 범천면이 1942년 우강면(牛江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6호로 서산군 대호지면(大湖芝面)과 정미면(貞美面)이 당진군에 편입되어 당진군은 10개면에서 12개면으로 확장되었다.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7호로 당진면이 당진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정미면 여미리(餘美里)가 서산군 운산면으로 분리되어 나갔다. 그리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로 합덕면이 합덕읍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2010년 1월 1일, 송악면이 송악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11년 6월 29일 「충청남도 당진시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이 제301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당진은 ‘시’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2012년 1월 1일 당진시로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2016년 현재 당진시는 2개 읍 9개 면 3개 행정동[11개 법정동] 221개 행정리[138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경제]
당진 지역은 광활한 우평·강문 평야 지대를 보유하여 전국적인 미곡 생산지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저수지 확보율이 떨어져 관개 시설이 적었고 이에 따라 천수답이 많았다. 1949년 공포된 농지 개혁에 의하여 소작을 하던 농토를 경작자 우선으로 배분됨에 따라 자영농이 크게 늘었지만, 농민들은 상환곡을 납부하기 여념이 없었다. 한국 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시절을 보내면서도 농민들의 소득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겨울만 되면 주민들은 술과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사례도 많았다.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당진 지역 주민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당진의 새마을 운동은 1970년 말 18개 시범 마을에 시멘트 총 6,030포대가 무상 공급되면서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시멘트를 공동 우물과 공동 빨래터, 마을 안길 등을 고치는 데 활용하였다. 그 후 새마을 운동은 더욱 활발히 진행되어, 마을마다 지붕 개량·농로 개설·마을 안길 확장·마을 회관·마을 창고·축사 개량·굴뚝 개량·토방 개량·우물 정비·지붕 개량·담장 개량 등으로 이어졌다. 당진시 석문면 삼화 1리에서는 1971년 7㎞의 농로를 곧게 개설하자, 충남도지사가 방문하여 ‘삼화 고속 도로’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그 후 새마을 운동은 환경 개선에서 소득 증대 사업으로 옮겨졌다. 당진 지역 주변에 널린 광활한 개펄을 활용해 간척사업과 굴양식, 소규모 공장[고춧가루·국수·떡방아], 가마니 공장·공동 축사 등을 세워 나갔다. 어느덧 1970년대 당진 지역은 소득 증대 농어촌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980년대 당진 경제는 대규모 간척 사업을 통한 농경지 확대와 방조제 건설로 요약된다. 원래 당진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하여 태풍이나 집중 호우 현상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빈번한 가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우평 강문 평야 지대의 경우는 제방을 범람해 들어오는 염해 피해가 상당했다. ‘백중사리’라고 불리는 음력 7월 보름날, 해수면은 가장 높아져 바닷물이 제방 끝까지 차올랐다. 이때 장마가 겹친다든지, 폭풍과 해일로 인하여 제방이 무너지면 농민들은 한 해 농사를 포기해야만 하였다. 우평강문 평야는 삽교천 제방으로 둘러싸인 저지대였기 때문이다.
방조제 건설은 1976년 12월 24일 착공하여 1981년 10월 25일 완공된 삽교천 방조제부터 비롯되었다. 당진·아산·예산·홍성 등 4개 시군의 농업 기반 조성을 위해 건설된 삽교천 농업 종합 개발은 24,700㏊의 농경지 개발과 함께 담수호인 삽교호를 건설하여 837㎞의 용수로를 갖추는 사업이었다. 3,360m의 삽교천 방조제가 준공되었던 1979년 10월 26일 준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삽교천 종합 개발은 당진의 전 지역에 가뭄 해갈이라는 단비를 제공해 주었다. 특히 삽교천으로 둘러싸여 침수 피해에 시달리던 우평강문 평야 지대의 농민들은 큰 시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 간척 사업은 대호 지구 농업 종합 개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1981년 4월 21일부터 시작해서 1984년 11월 16일 방조제 7,800m를 준공하였다. 방조제는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서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를 연결하였다. 전체 개발 면적은 7,700㏊에 달했고, 이 중 50%에 해당하는 개펄이 농경지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농업용수로 318㎞를 개설하여 수리 안전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세 번째 간척 사업은 석문 지구 간척지 개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은 1987년 8월에 시작하여 1991년 11월 13일 방조제를 준공하였다. 석문방조제는 10,600m로 당진시 송산면 가곡리에서 석문면 장고항리를 연결하였고, 3,750㏊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로써 수많은 개펄을 메워 농경지로 만들었고 담수호를 조성하여 용수로를 개설하였으며 천수답을 완전한 수리 안전답으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지나친 방조제 건설은 생태계 붕괴와 같은 환경 파괴를 가져온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1990년대의 당진 경제는 한보 사태와 함께 하였다. 우선 한보 그룹은 1990년부터 5조 원 규모의 당진 제철소 건설을 시작하였다. 한보 그룹은 처음에 1조 원 규모의 코렉스 설비를 도입하여 철강 사업을 시작하였고, 투자비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결국 1997년 5월 한보 그룹은 도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당진 지역은 부도 여파로 171개 영세 업체가 연쇄 부도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2004년 현대 제철이 한보 철강을 인수하면서 당진의 경제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또한 동부 제철의 확장과 동국 제강의 입주, 유관 기업의 입주 등으로 당진은 현재 세계적인 철강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당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회사는 한국 동서 발전이다. 한국 동서 발전은 1996년 6월 당진시 석문면 교로리에 당진 화력 발전소 1호기를 준공한 이래 2016년 현재 8호기가 완공되어 총 4000㎽의 설비 용량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건설을 추진 중인 1000㎽급 9호기와 10호기가 준공되면 총 설비 용량 6000㎽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발전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발전에 뒤이은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현대 제철과 동서 발전에서 발생하는 미세 먼지 피해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호흡기 질환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화력 발전소의 증대는 송전 선로의 추가 건설로 이어졌다. 현재 당진 지역에는 15개 송전 선로 189㎞ 노선에 526개의 철탑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강력한 전자파가 노출되어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한 형편이다.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지혜가 절실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