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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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門 |
영어공식명칭 | Sodeulgangmun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학로 |
비정 지역 | 소들강문 -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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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지명 |
관련 문헌 |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당진군지|당나루의 맥락|우강면지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평야.
[명칭 유래]
소들강문은 소들과 강문이 합쳐져 지명이 된 경우이다. '소들'의 어원은 철종 때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우평(牛坪)'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내포 지방의 방언인 솟뜰이란 말의 어원과 일치한다. 솟뜰이란 입술의 인중과 같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에서 퇴적의 결과 생겨난 섬과 같은 작은 돌출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들은 솟뜰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간척의 과정을 통해 논이 되었고, 소들이라는 지명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또한 강문(江門)이란 말의 어원도 삽교천이라는 강의 입구를 뜻하는 말로 지금의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 사발 포구 지역을 말한다. 즉, 사발포를 통해 해상 운송을 하던 시기에 사발포를 삽교천의 강 입구로 인식하여 강의 입구를 뜻하는 ‘강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로써 소들과 강문을 합쳐 부르던 소들강문이 일반화되면서 우평강문이 되었고, 우강면의 지명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소들강문은 예로부터 토질이 비옥한 넓은 평야로 서울에 가깝고 조운이 발달하여 해상 교통을 이용한 운송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재경 부재 지주(在京不在地主)들인 양반 사족(兩班士族)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던 곳이다. 이런 특징으로 소들강문에는 넓은 평야 만큼이나 양반 사족에 의한 농민 착취와 수탈의 역사와 이에 저항하는 투쟁의 역사가 동시에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충청남도 서북부를 흐르는 삽교천 유역을 따라 펼쳐져 있는 예당평야는 전국에서 김제 만경평야 다음으로 넓은 평야이다. 예당평야는 삽교천을 따라 예산 고덕면 구만리에서 시작하여 당진시 합덕읍과 우강면을 지나 신평면까지 이르는데, 예산 고덕면 평야를 황금들이라 칭했고, 합덕읍 평야를 검은들이라 했으며, 우강면 일대의 평야를 우평강문(牛平江門), 즉 소들강문이라 불렀다. 소들강문은 예당평야 중 가장 넓은 평야 지역으로 가장 중심에 위치한 곳이다. 소들강문이 있는 당진시 우강면은 원래 범천면(泛川面)이라 불렸는데 장마에 삽교천이 범람하는 일이 잦아 소들강문에서 뜻을 따라 1942년부터 우강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관련 기록]
1930년대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 8쪽에 우평(牛坪)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의 동남쪽 40리에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토정 이지함이 아산을 다스릴 때 한진 앞바다가 크게 터져 육지가 바다가 된 이후 근 100년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간사지가 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토착민이 둑을 쌓아 논을 만들어서 큰 들이 되었는데, 우평이란 지명을 붙인 뜻은 소 모양의 돌 두 개가 바다 섬 중에 돌출했다가 자연스럽게 매몰되었다. 들의 동쪽에 대각리가 있는데 속칭 이르기를 두 소 뿔 사이에 만인이 살 수 있다고 말을 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