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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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의미역 | Goryeo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차용걸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역사.
[개설]
고대 말기 지방 호족의 성장으로 통일신라가 분열되면서 시작된 후삼국시대에서 음성 지역은 서기 900년경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에 예속되었다. 그후 폭정을 일삼던 궁예가 쫓겨나고, 서기 918년 왕건이 여러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고 인심을 수렴하는 데 성공하여 새 왕조를 개창하면서 음성군이 속한 충청북도 북부 지역은 자연 고려에 예속되었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원대한 포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 고려는 신라와 화친하고 후백제와 대결하여 결국 신라의 귀순과 후백제 정벌을 통해 서기 936년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후 475년간 나라를 지속하다 1392년 7월 공양왕이 선양의 형식을 빌려 퇴위함으로써 멸망하고 만다.
[연혁]
고려로 들어오면서 음성은 고대의 신라 경덕왕 때에 개칭한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별칭으로 설성(雪城)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신라 때 흑양군의 영현(領縣)이었다가 훗날 충주의 임내(任內)가 되었다고 하였으나,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서는 고려 때에 이르러 충주의 임내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고려 때는 충주에 속했다가 훗날 감무(監務)가 두어진 곳이라고 하였다. 이웃한 음죽현은 현종 9년에 충주로 내속(來屬)되었으며, 충주 소속의 괴주·장연·청풍·장풍 등이 모두 1018년(현종 9)에 소속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음성은 소속이 바뀐 연대를 밝히지 않고 있어 이미 고려 초기부터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흑양군인 진천 지역은 고려 초기 호족 세력도 강력하였던 지역이므로 더 늦게 소속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시대 음성현의 치소(治所)는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었던 자리가 아니고 관평(官坪)이라 불린 수정산 남쪽 아래에 있었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적(古跡)의 고산성(古山城)에서 수정산 위에 돌로 쌓은 성이 조선 초기에는 경영이 폐지되었고, 그 남쪽(현재의 평곡리)에 옛 고을의 터가 있어서 관평이라 불린다고 되어 있다.
[향촌사회]
고려시대 음성현의 범위는 현재의 충주시 서쪽 45리의 용안역(用安驛)이 음성 소속이었다가 조선 전기인 1478년(성종 9)에 충주로 소속된 것으로 보아 보다 넓은 범위였다고 여겨진다. 음성 지역의 부세는 충주 덕흥창으로 운반되어 한강 물길로 운반되었다. 봉수가 가섭산에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에도 가섭산의 봉수를 보고 남쪽 지역에서의 동향을 알 수 있었다.
음성현에 소속된 특수한 행정구역으로는 금촌부곡(金村部曲)이 서쪽 15리 거리에 있었고, 파천부곡(巴川部曲)이 남쪽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천부곡은 지금의 원남면 보천리이고, 금촌부곡은 금왕읍 금석리 지역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서는 보천리와 초천리에 옛 고을 터가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어떤 흔적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시대 음성의 유력한 성씨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박(朴)·채(蔡)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송(宋)·윤(尹)·경(敬)·정(鄭)의 4성은 망성(亡姓)이 되고, 최(崔)·이(李)·신(申)의 3성이 속성으로 나타나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음성을 본관으로 한 성씨로 송·윤·경·정·박·채의 6성과 속성으로 최·이·신을 들고, 파천부곡을 본관으로 한 채·경·윤씨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 기록에 음성현의 토산물로 대추를 들고 있으며, 그외에 벌꿀과 인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교통]
음성 지역은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교통의 편의를 돕기 위해 마련된 역제(驛制)를 보면, 전국에 525개소의 역을 설치하고 이를 다시 22도(道)와 대·중·소의 3로(路)로 나누었는데, 음성 지역에서는 22도 중 광주도의 15개 역 중 무극(無極)[음죽]과 요안(遙安)[음성] 역이 있었다. 역에는 토지와 노비가 규정에 의해 주어져 국가 관리 하에 관리와 관공문서의 왕래 및 공납물의 운반을 담당하였다.
[주요 사건]
고려시대 전국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은 몽고와의 항쟁이었다. 1231년(고종 18)에 1차 침입한 이후 1259년(고종 46) 4월 화의가 이루어지기까지 28년 동안 몽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침입하여 고려의 국토를 유린하였다. 이 기간에 음성과 관련한 사실은 기록된 것이 없으나, 이웃한 충주와 괴산·진천 등지에 침입한 사실과 싸워서 물리친 승전 기록 등으로 미루어 음성 지역 역시 피해가 막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왜구의 침입에 노출되었는데 『고려사』권45의 공양왕 2년 6월 경진조를 보면, “왜구가 양광도에 침구하여 음죽·음성·안성·죽주·괴주(괴산)에 이르렀으므로 지밀직사사 윤사덕(尹師德) 등을 보내어 이를 잡게 하니, 적을 영주(천안) 도고산 아래에서 만나 백여 급을 베고 포로로 되었던 남녀와 빼앗겼던 가축을 도로 찾았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내륙 지역인 음성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고려시대의 음성의 역사와 문화를 밝히기 위한 조사와 연구는 아직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향토사와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수정산성과 음성 망이산성 등 고려시대 성곽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사와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옛 음죽현의 영역과 충주목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역이 있는 등 고려시대 음성현의 연구는 조선시대 음성현을 범위로 한 연구에 비해 어려움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