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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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明漢 |
영어공식명칭 | Lee Myeonghan |
이칭/별칭 | 천장(天章),백주(白洲),문정(文靖)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근하 |
출생 시기/일시 | 1595년 - 이명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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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이명한 사마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16년 - 이명한 증광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3년 - 이명한 경연 시독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2년 - 이명한 이조 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3년 - 이명한,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에 억류되었다 돌아옴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이명한,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데리오 돌아옴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이명한 예조 판서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45년 - 이명한 사망 |
부임|활동지 | 한성부 - 서울특별시 |
묘소|단소 | 이명한 묘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연안 |
대표 관직 | 이조 판서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이명한(李明漢)[1595~1645]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천장(天章)이고, 호는 백주(白洲)이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이순장(李順長), 할아버지는 삼등현령(三登縣令) 이계(李𡹘),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 이정구(李廷龜)이다. 어머니는 예조 판서를 역임한 안동 권씨(安東 權氏) 권극지(權克智)의 딸이다. 부인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역임한 반남 박씨(潘南朴氏)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동생은 형조 참판을 역임한 이소한(李昭漢)이다. 자식으로는 이일상(李一相), 이가상(李嘉相), 이단상(李端相) 등 세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명한은 1610년(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16년(광해군 8)에는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 성균관 전적(典籍), 공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재능을 인정받아 경연 시독관에 제수되고 교서(敎書)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이어 이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암행어사로 관동(關東) 지역의 민심을 살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가 공주로 파천하는 길에 수원에 들렀다. 이때 이명한은 이식(李植)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짓고, 김류(金瑬) 등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조 참의, 병조 참의, 좌승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인조를 호종하여 강화도에 들어갔다. 1635년(인조 13)과 1636년(인조 14)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이어 당하면서 잠시 관직을 물러났다. 상이 끝난 뒤 병조 참의로 돌아왔으며, 이후 도승지, 한성부 우윤, 대사헌 등을 거쳐 1642년(인조 20) 이조 판서에 올랐다.
1643년(인조 21)에는 척화파로 지목되어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돌아왔다. 이어 1644년(인조 22)에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심양에서 데리고 왔다. 1645년(인조 23)에는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는 이유로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 풀려 나온 후에는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학문과 저술]
이명한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백주집(白洲集)』 20권이 있다.
[묘소]
이명한의 묘는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