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900662
한자 許格
영어공식명칭 Heo Gyeok
이칭/별칭 춘장(春長),창해(滄海),아호(鵝湖),대명처사(大明處士),숭정처사(崇禎處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가평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허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84년 - 허격, 이제두·백해명과 함께 조종암에 문자 새김
몰년 시기/일시 1691년연표보기 - 허격 사망
거주|이주지 둔산 - 충청북도 단양군
묘소|단소 허격 묘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양천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

[가계]

허격(許格)[1607~1691]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자는 춘장(春長)이고, 호는 창해(滄海)·아호(鵝湖)·대명처사(大明處士)·숭정처사(崇禎處士)이다. 아버지는 시(詩)로 명성이 높았던 어은(漁隱) 허회(許淮)이다. 1607년(선조 40) 1월 14일 허회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허격은 1627년(인조 5) 일어난 정묘호란에서 조정이 후금(後金)과 강화를 맺자 산 속으로 은거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태백산에 있던 허격은 의병을 모집하려고 하였는데, 인조가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격은 통곡하면서 벼랑에서 떨어져 죽으려 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후 단양(丹陽)의 둔산(遯山)에 은거하면서 호를 ‘창해처사(滄海處士)’라고 하였다.

1684년(숙종 10)에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 유생 백해명(白海明) 등과 함께 명나라가 베푼 은혜와 청나라에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뜻을 바위에 새겼다. 맨 위에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어필 ‘사무사(思毋邪)’를 본뜨고, 이어서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과 효종이 내린 글귀를 송시열(宋時烈)이 쓴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途遠 至痛在心)’을 새겼다. 그리고 조종암 아래 연못 위에 조그마한 단(壇)을 설치하였는데, 숭정제의 기일에 찾아와 북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북벌을 추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효종의 기일이 되면 슬프게 울며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죽은 뒤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묘소]

허격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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