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7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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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辰仝 |
영어음역 | Yu Jindong |
영어의미역 | Yu Jindong |
이칭/별칭 | 숙춘(叔春),죽당(竹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수연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 자는 숙춘(叔春), 호는 죽당(竹堂)이다. 증조부는 유열(柳悅)이고, 할아버지는 유자문(柳子文)이다. 아버지는 유한평(柳漢平)이며, 어머니는 홍귀해(洪貴海)의 딸이다. 원래 진주유씨의 세거지는 경기도 고양 지역이었는데, 유진동의 증손 유충걸(柳忠傑)[1588~1665]이 광해군 폐모 사건 등의 어수선한 정국을 피해 외향인 공주에 이거하면서 공주 지역의 사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활동사항]
1522년(중종 17) 사마시를 거쳐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승정원에 들어가서 주서가 되어 스스로를 엄격히 지키고 권력과 귀인에게 아부하지 않아 탄핵되기도 하였다. 1537년 사헌부감찰이 되고 이어 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었고, 시강원사서가 되는 등 조정의 총애를 받았다.
1538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 홍문관교리, 응교, 장령, 집의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543년 부제학에 올랐고, 이듬해 동부승지, 우승지, 1546년 좌승지, 도승지를 차례로 거쳤다. 1548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공조참판,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지내고, 1550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경기도·평안도 관찰사를 지냈고, 1554년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경연(經筵)에서 『주역』에 밝은 자를 고르게 됨에 따라 다시 기용되어 진강하였다. 이어서 한성부좌윤,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오르고, 1559년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직하던 중 중풍을 얻어 사직을 청했는데, 왕이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임명하자 유진동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녹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장, 글씨,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데, 특히 죽화(竹畵)를 잘 그렸다. 남대문의 편액인 ‘숭례문(崇禮門)’을 썼다는 설도 있다.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에 있다. 비문에는 ‘자헌대부공조판서겸동지춘추관사오위도총부총관유진동묘(資憲大夫工曹判書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摠管柳辰仝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 아래쪽에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홍섬(洪暹)이 짓고 송인(宋人)이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1799년(정조 23)에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후손들이 1827년에 금호서사(錦湖書社)를 세우고 정민공 유진동과 충경공 유형, 금사 유충걸 3인을 제향해 왔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