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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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長生 |
영어음역 | Gim Jangsaeng |
영어의미역 | Gim Jangsaeng |
이칭/별칭 | 희원(希元),사계(沙溪),문원(文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경수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활동한 문신, 학자.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이고, 호는 사계(沙溪)이다.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고, 아들은 김집(金集)이다.
[활동사항]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과 평시서봉사, 동몽교관, 인의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되고,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 전부령으로 승진하였다.
1596년 연산으로 낙향했을 때 단양과 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익위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군자감첨정으로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았고,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북인이 득세하자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 회양부사, 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조정에 나가 장령(掌令), 사업(司業)으로 있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평정된 뒤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였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에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참여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고 낙향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배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였으며,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1630년에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 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학문과 사상]
학문적으로 송익필(宋翼弼),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받았다. 1560년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다. 예학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아들 김집이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어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이유태(李惟泰), 강석기(姜碩期),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최명룡(崔命龍), 김경여(金慶餘), 이후원(李厚源), 조익(趙翼), 이시직(李時稷), 윤순거(尹舜擧), 윤원거(尹元擧), 최명길(崔鳴吉), 이상형(李尙馨), 송시영(宋時榮), 송국택(宋國澤), 이덕수(李德洙), 이경직(李景稷), 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생이지만, 문인들은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 김집을 ‘선생’이라 불렀다.
[저술 및 작품]
『상례비요』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 등 예에 관한 저서와, 『근사록석의』·『경서변의』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묘소]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7-4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