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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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이칭/별칭 | 7년전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전쟁.
[개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면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 상륙을 시발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에 조선은 관군과 각처에서 모집된 의병 등이 총력전을 펼쳤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명(明)이 개입하여 조선과 연합군을 형성, 일본에 대항하는 한편, 일본과의 전쟁 화의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 계속되던 강화회의가 1596년 결국 결렬되면서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이어졌고, 1598년이 되어서야 전쟁은 끝이 났다.
[의병 활동]
공주 지역에서도 호서 지방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킨 중봉 조헌을 중심으로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이 의병을 일으킨 5월 초순은 왜군이 충청도를 막 통과한 시기였다. 조헌은 옥천군에서 봉기하였지만, 본격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4차 기병에는 공주에서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고 행군하여, 의병 1600여 명을 모집하였다.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공주 출신의 노응환, 노응탁, 노응호의 삼형제도 청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
공주 출신 영규도 봉기에 앞장섰다. 영규는 계룡산 갑사에 들어가 청련암(靑蓮庵)에 있으면서 무예를 익혔다고 전해진다. 영규는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의승 수백 명을 규합하였다고 한다. 청주성 공략에서 영규는 제일 먼저 돌입하여 마침내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러한 영규의 역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호령하는 것을 보면 바람이 이는 듯하여 수하에 감히 어기는 자가 없었고 질타하는 소리에 1천명의 중들이 돌진 제군(諸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조헌과 영규는 임진왜란 때 최대의 의병전투라 할 수 있는 금산 전투에 나갔다. 금산 전투에서 영규와 조헌이 이끄는 의병은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중과부족으로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고, 노응환과 노응탁의 형제도 순절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로 왜군도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결국 호남 쪽으로 직접 진격하지 못하고 옥천 쪽으로 물러났으며, 이후 금산성을 버리고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전투가 끝난 뒤,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아군의 시체를 모아 그들이 싸웠던 겸양산 기슭에 구덩이를 파서 합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군에 있는 칠백의총이다. 영규는 1592년(선조 25) 10월에 동지중추부사로 증직되었다. 영규의 묘는 공주시 계룡산 유평리에 있으며, 월암리 길가에는 영규의 충절을 기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노응환, 노은탁 및 노응호 삼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유적이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 있는 삼의사이다.
[정유재란]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왜군 사이에 진행되던 화의는 결렬되고, 왜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으니,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이다. 1598년(선조 31)에 명의 증원군이 다시 도래하여 서울로부터 3도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을 개시하였는데, 공주에는 제독 유정이 이끄는 13,600명의 서로군이 진입하여 순천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명군은 공주에 주둔하면서 군기를 엄히 단속하고 주민을 정성껏 보살핌으로써 왜군의 위협 하에서도 안정하게 생업에 안주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공주 사람들은 이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를 세웠다. 비는 1599년(선조 32) 금강 변 남안에 세워졌었는데, 그 후 홍수로 물속에 매몰되었던 것을 관찰사 송정명의 지원으로 1713년(숙종 39) 중건하였다.
공주에 세거하던 무반 유형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장군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고, 해남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을 만나 이순신의 막료로 활동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유형은 특히, 노량해전에서 적탄을 맞고 전사한 이순신을 대신하여 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어 냄으로써 전공을 남겼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흔히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왜군이 계획적으로 조선의 도공(陶工)을 잡아가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조선 도공 납치는 큐슈 사가현[佐賀縣]의 나베시마[鍋島] 영주에 의해서도 감행되었는데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전하는 이삼평도 일본에 끌려갔다. 이삼평은 아리타[有田] 가미시라가와[上白川]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광(白瓷鑛)을 발견하고, 백자를 만들었다. 이에 각처에서 도자기 굽는 법을 배우려고 모여들어 아리타는 일본 자기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삼평은 도공을 지휘하는 대장(大匠)이 되었고 사후에는 이삼평을 배향하는 도우야마 신사[陶山神社]와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