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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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圭大師碑 |
영어의미역 | Stele of Yeonggyudaesa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5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영규대사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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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규대사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건립시기/일시 | 1813년(순조 13) |
관련인물 | 영규대사 |
높이 | 93㎝ |
너비 | 43㎝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54 |
소유자 | 갑사 |
관리자 | 갑사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 있는 영규대사의 임진왜란 당시 행적을 기리는 비.
[개설]
영규대사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인들의 침략과 약탈을 참지 못하고 승병장(僧兵將)이 되어 승려 수백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영규대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영규대사의 호는 기허(騎虛)이고, 속성은 박씨이며, 본관은 밀양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래 휴정대사의 수제자로, 계룡산의 갑사 내에 있는 청련암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천여 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청주의 성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금산성에서 왜군과 항전하였으나 부상을 당하고 지금의 월암리에 이르러 숨을 거두었다. 후에 현재의 위치에 장례하였다.
[건립경위]
영규대사비는 영규대사가 마지막에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지는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에 세워져 있다. 정려비의 후면에는 건립 연대를 숭정기원후계유(崇禎紀元後癸酉)로 기록하여 이 기록을 믿을 경우 1633년이 된다. 하지만 실제 비를 건립한 사람들의 생존 연대와 비교하면 맞지 않아, 당시의 인물들이 활동 연대로 보면 1753년이나 1813년 계유(癸酉)임이 밝혀진다.
특히 대시주 이덕윤(李德潤)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이덕윤은 공주향교의 『청금록(靑衿錄)』에 1741년에 등재되는 인물이다. 또한 영규대사의 묘비가 1810년(순조 10) 건립될 때 속성 밀양박씨 후손들의 봉사(奉祀) 의식과 연계되어 그들에 의하여 충절비가 만들어지고 있음으로 미루어 1813년(순조 13)이 합당할 듯하다.
[위치]
공주시에서 논산 방면으로 가는 국도 23호선을 따라 12㎞ 정도 가면 계룡면 면소재지가 나온다. 영규대사 정려는 도로 우측에 있는 면사무소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데, 정려비는 이 정려 밖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형태]
현재는 정려 밖 왼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는 안에 있던 것을 1995년 정려 중수를 하며 밖으로 옮겨 세웠다. 정려비는 높이 93㎝, 너비 43㎝, 두께 12㎝이다.
[금석문]
비석의 전면에는, ‘의병승장영규지문(義兵僧將靈圭之門)’이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숭정기원후계유오월(崇禎紀元後癸酉五月) 대시주 이덕윤(李德潤), 유중(劉重), 주사 승 각총(覺聰), 방손(傍孫) 박경태(朴景泰)가 건립한 것임을 기록하고 있다.
[현황]
영규대사비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면소재지에 자리하고 있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1995년에는 중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공주 지역 최초의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를 통해 이곳의 호국정신을 추측해 볼 수 있으며, 영규대사비를 세울 당시 인물들을 통해서는 당시 마을의 지배 세력을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