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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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淸南道道廳移轉反對運動 |
영어의미역 | Movement against Moving of the Chungcheongnamdo Provincial Govern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호 |
[정의]
1931년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충청남도 도청을 대전 지역으로 이전하는 것에 반대한 운동.
[개설]
공주 지역은 조선시대에 충청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역과 호남 지역의 교통과 상업 교류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대전 지역을 통과하면서, 대전 지역이 삼남 교통의 요충지이며 물산 집산지로 변모하면서 신흥 상공업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대전 지역은 일본인들의 대거 진출로 근대 도시 기반을 갖추면서 신흥 도시로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제강점기 일본은 한반도를 엑스(X)자형의 종관 철도망으로 연결하면서 시정상 편의라는 명분으로 철도가 통과하는 지점에 도청 소재지를 이전시키는 식민지 지배 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1910년에는 경기도 도청 소재지를 수원에서 경성부로, 1920년에는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를 원산에서 나남(청진)으로, 1923년에는 평안북도 도청 소재지를 의주에서 신의주로, 1925년에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를 진주에서 부산으로 각각 이전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지배 체제의 확립과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한 정책으로 교통 통신망을 구축하는 한편, 통치 구역을 정비하면서 기존의 한국 사회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전개하였다.
[발단]
충청남도 도청의 이전은 1910년을 전후하여 호남선 부설 논의가 전개되면서 주로 대전 지역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여론이 대두하였으나, 당시 대전 지역은 공주 지역보다 인구나 도시 기반 시설 측면에서 불충분하였다. 단지 1920년대 인구 구성비에서 일본인이 공주 지역보다 대전 지역에 2배 정도 많았다. 1923년 공주 지역인구는 8,304명(한국인 6,548명, 일본인 1,605명)이고 대전 지역 인구는 6,728명(한국인 2,114명, 일본인 4,798명)이었다.
1925년경 경상남도 도청 이전 문제와 더불어 조선총독부 일각에서 충청남북을 합쳐 조치원에 충청도 도청을 설치해야 한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며, 1929년에는 조선총독부 야마나시[山梨半造] 총독의 독직사건이 여론화되는 과정에서 대전 지역 유지들의 충청남도 도청 유치 로비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에 공주 지역유지들은 여러 형태로 도청 이전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의 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충청남도 도청 이전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더는 진전되지 못하였다.
[경과]
공주공영회는 1929년 1월 도청 이전 반대를 위하여 소집된 시민대회에서 정식으로 공주시민회를 조직하였다. 공주시민회는 1930년 11월부터 1931년 3월 초순까지 공주 지역의 도청 이전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공주시민회는 회장에 일본인, 부회장은 한국인으로 구성하였는데, 도청 이전 반대를 위한 실행위원을 선출할 때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각각 20인씩으로 구성하였다.
실행위원은 한국인 부회장인 권익채(도평의원회)와 오경달(면협의원, 정미소운영), 서덕순(대지주, 금융조합장, 신간회 부회장), 심재욱(도의원, 사업가), 김낙현(충남 의업조합부조합장), 김영배(공주수양청년회와 신간회 임원, 청년상회), 성보영(금융조합장, 대지주), 이범규(노동협성회 발기인, 양조소매업), 윤종혁(공주상번회부이사장, 포목상점), 김기태(상번회이사, 시장상인), 지헌정(읍회의원, 동아일보 지국장), 서범순(면협의원, 대지주), 양천손(읍회의원, 양조업), 이태영(상점), 이원태, 민영용, 양명호(수양청년회임원), 백창진(양조소매), 류갑수(변호사), 백종성, 곽상남 등 공주 읍내의 유지들로 구성되었다.
일본인 유지들은 진정과 로비를 맡고, 한국인 유지들은 대중 집회나 시위를 맡는 등 역할 분담을 하였다. 도청 이전 반대운동으로 일본인과 공주 지역유지들은 일정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본격적인 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1930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가 정식으로 충남도청이전신축예산안을 편성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충청남도 지역의 각 군은 도청 이전에 반대하거나, 도청을 유치하려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주 지역에서도 지역 유지들은 공주시민회를 개최하고 3,000여 원의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등 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1931년 1월 3일 도지사 관저에서 김영배·노원하·지헌정·서겸순 등의 주도로 500여 명이 참여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동시에 30여 명의 진정 위원단을 조선총독부에 파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천안 지역과 조치원 지역 유지들도 충청남도 도청의 대전 지역 이전 계획에 반대하여 충청남도 도청과 조선총독부에 진정단을 파견하는 등 도청 유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분란의 소지를 없애고 도청 이전 문제를 매듭지기 위하여 공주는 교통이 불편하여 행정 중심지로서 적당치 않다는 것과 청사가 낡고 협소하여 민중의 편익을 도모하기가 어렵다는 것 등의 사유를 들어 193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이름으로 충청남도 도청의 대전 지역 이전을 기정사실화하였다.
공주 지역 유지들은 1931년 1월 16일 시민대회에서 도청 이전은 총독 정치의 본령에 반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충청남도 도청 앞 시위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대규모 상경 투쟁단을 조직하는 한편 동경제국의회에까지 진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주 지역시장 상인들도 철시로 동참하였으며, 충청남도 당국은 공주시민회 대표와 각 구장을 도청으로 불러 이미 결정된 사안이므로 보상 문제와 같은 사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회유와 협박을 가하면서, 경찰을 동원하여 시민회 간부를 잡아 가두고 사무실을 수색하는 탄압을 자행하였다.
1931년 2월 4일 동경에서 ‘충청남도 도청은 공주 지역에 신축하기로 청원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의되었으니 시민 일동은 일층 분투 바란다.’라는 전보의 도착으로 공주시민회 주도의 시위는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1년 2월 5일 일본 집권 민정당은 중의원에서 의회는 일시 동인의 정신으로 진정을 청취해야 2천만 동포의 신뢰와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명분으로 충청남도 도청 이전 반대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한편, 공주 지역유지들은 도청 이전 반대운동의 논리와 명분을 만들어내려고 공주 지방민 대표 일동 명의로 「소화 6년 2월 조선총독부에 충청남도청 이전의 이유를 논박함」이라는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대전 지역은 일본인 도시, 공주 지역은 한국인 도시라는 명분으로 조선총독부와 제국의회 및 언론이나 여타 지역 군민들을 설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논박을 한 주요 내용은 ‘평안남도나 경상남도 도청처럼 교통상의 이유로 불편이 작지 않은 곳에 있는 도청을 점차 적당한 곳으로 옮겨왔다, 과거에는 남선 각지로 통하는 요지였으나 철도 교통의 발달로 장차 교통상의 요충으로서의 의미가 없어졌다, 금강에 토사가 퇴적되어 수운의 편이함이 사라졌다, 1929년 도평의회에서 공주 선출 의원을 제외한 전체 도평의회원이 도청의 대전 이전을 찬성했다, 도청 건물이 낡았다, 민중의 편의를 도모하고 사무 능률을 증진시키려면 도청을 대전으로 옮기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공주가 철도로부터 8~9리나 떨어져 있다, 홍수 시에 교통 통신의 두절로 관민이 불편을 겪고 있으며 이런 문제는 가까운 장래에 해결이 어렵다, 대전 지역보다 인구 규모가 작다, 공주 지역은 이미 상공업 도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단순히 도청 소재지라는 이유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도청 이전 영향은 일부 지주나 상인들에게만 피해를 미칠 것이다.’라는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 비판 가운데 ‘철도 교통의 발달로 교통상의 요충지로서 의미가 없어졌다.’라는 주장에 대해 ‘외국의 예를 보아도 앞으로는 철도 교통보다 도로 교통이 더 발달할 것이다.’라는 주장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매우 타당성이 있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1931년 3월 13일 일본 귀족원은 중의원의 결의를 무시하고 조선총독부안을 지지하여 도청신축예산안을 결의하였다. 공주 지역시민들은 1931년 3월 11일 밤부터 13일 오전까지 산성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하고 시장통에서 투석전을 감행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일본은 300여 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50명을 잡아 가두는 등 강경 진압을 하였다. 이후 1931년 4월에 시행된 읍회의원선거에 일부 유지들이 불참을 선언하는 등 도청 이전에 항거하였다. 공주 지역에서 도청 이전 반대운동은 1931년 1월 3일부터 3월 13일까지 두 달 열흘 정도 전개되었다.
[결과]
대전 지역에서는 1931년 12월 12일에 충청남도 청사 상량식을 거행하였고, 1932년 5월 30일에 공사비 35만 9천 원으로 충청남도 도청사가 준공되었다. 이어 1932년 6월 17일에는 충청남도 도청을 공주 지역에서 대전 지역으로 이전하는 「조선총독부령」 제48호가 정식 공포되었다. 1932년 9월 3일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그 해 10월 1일에 충청남도청대전축하회를 3일간에 걸쳐 거행하면서 충청남도 도청의 대전 지역 이전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충청남도 도청 이전을 계획대로 추진하면서 1년 이상 공주 지역에 도청 이전에 따른 후속 조치를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공주 지역유지들은 총독부와의 접촉을 통해 충청남도와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 주어야 할 보상 요구 13가지와 일본 정부의 국비로 시설해 주어여야 할 보상 요구 7가지를 제시하였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에서는 중선 철도의 건설·관립 사범학교 설치·궁민 구제 자금의 융통 등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 요구 3가지를 결의하고 폐회하였다.
공주 지역은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로서 위상은 잃었으나 1933년부터 금강교 가설과 공주농업학교를 개교하였고, 이후에 도청 관련 행정기관의 대전 이전을 상당한 기간 보류하였다. 그 후 도시 기반 시설의 확충과 아울러 각종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교육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성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체제 강화를 위한 정책으로 추진된 충청남도 도청의 대전 지역 이전은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로 근대적 도시로의 변모를 추진하던 공주 지역의 발전에 지연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후 공주 지역은 근대 도시 시설을 갖추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육 도시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