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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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美術 |
영어의미역 | Fine Arts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훈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에서 행해지는 색채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예술의 한 분야.
[개설]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산천, 그리하여 예부터 청풍명월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던 충청남도의 중심부에 있는 공주는 후박한 인심과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으로 천혜의 예술적 토대와 여건을 갖춘 곳이다. 특히 세계 고고학 사상 가장 중요한 발굴 사례로 손꼽히는 무령왕릉의 발견은 그때까지의 백제사 연구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정교하고 세련된 미술 제품들은 공주라는 도시가 선진 미술 도시였음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패망한 국가였다는 이유로 백제는 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비극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훌륭한 미술 전통은 안타깝게도 후세에 제대로 계승되지를 못했다. 하지만 공주 지역은 지정학적 이유로 항상 우리나라의 지방 중심 도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의 충청감영 설치와 더불어 조선 말기에는 지방 행정의 구심점이었던 도청 소재지가 되었던 것이 그 증거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함께 공주에 일찍이 신교육 체제의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었던 점 등도 공주 지역이 근대 미술의 산실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변천과 현황]
공주에서 미술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를 못했다. 해방 이후에 각급 학교에 재직 중이던 미술 교사 중심의 활동이 거의 전부였으며, 여기에 몇몇 간판업자, 유랑 화가, 초상화 제작자 정도가 포함될 정도였다. 난을 잘 그려 유명했던 이경배는 공주 출신으로 이름이 높은 화가였으나, 공주에 머물러 작품 활동을 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못했다. 더욱이 민족사의 가장 비극적인 6·25전쟁이 일어나 미술은 물론 모든 예술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들어와 6·25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무렵, 공주 지역의 미술계는 새로운 바람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공주교육대학 학생들의 미술 교육을 위해 저명한 작가들이 공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김기숙, 이남규, 조영동 같은 작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학생들의 미술 교육을 담당함은 물론, 개인적인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공주의 미술계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1973년에는 공주사범대학에 미술교육과가 설립됨으로써 공주사범대학에 초빙된 국내의 정상급 미술가들이 공주의 미술계에 합류하게 되었고, 공주교육대학에서 배출된 미술인과 정상급 미술가들의 문하생들에 의해 공주의 미술계는 더욱 풍부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후 공주문화대학(2001년 3월 공주대학교에 통합됨)에는 산업 공예 디자인, 만화, 귀금속 디자인 관련 학과가 개설되었고, 공주영상대학에는 애니메이션, 그래픽디자인 관련 학과가 개설되어 공주의 미술계는 그 어느 지역보다도 풍부한 인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