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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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利仁驛 |
영어음역 | Yiinyeok |
영어의미역 | Yiin Traffic Post Stat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정의]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개설]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에 있던 역원이다. 고려 때부터 1894년 갑오개혁으로 역원제가 폐지될 때까지 있었다. 1535년(중종 30)부터 찰방(察訪)이 주둔하여 산하의 9개 역을 관할하였다.
[제정경위 및 목적]
이인면은 한양과 호남으로 통하는 대로에 있어 백제시대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인부곡이 있었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이곳에 역원을 설치하여 한양과 호남을 잇는 육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기능하게 하였다.
[관련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 이름은 이도(利途)이고, 주 남쪽 25리에 있다. 승(丞)이 있는 본도에 예속된 역이 9개가 있으니, 용전(龍田)·은산(恩山)·유양(楡楊)·숙홍(宿鴻)·남전(藍田)·청화(靑化)·두곡(豆谷)·신곡(新谷)·영유(靈楡) 등이다. 승 1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주의 남쪽 25리 반탄면(半灘面)에 있다. 기마 4필, 복마(卜馬) 7필, 노(奴) 47명, 비(婢) 15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충청도읍지』에는 “찰방이 있다. 부의 남쪽 25리 반탄면에 있다. 기마 4필, 복마 8필, 노 47명, 비 15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산지』에는 “찰방이 있다. 부의 남쪽 25리 반탄면에 있다. 기마 4필, 복마 8필, 노 47명, 비 15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는 “충청도감사가 이도역(利道驛)을 이인역으로 고치자고 주청하였다. 임금의 이름과 음이 서로 같음을 피하기 위해서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驛丞)을 두다. 병조에서 아뢰었다. ‘이보다 먼저 제도(諸道)의 참·역 혹은 역승을 파하고 각각 그 부근에 합하여 하나의 길[道]을 만들어서 찰방을 두었으나, 관할하는 역이 많고 길이 멀리 떨어져서 찰방이 두루 살피기가 어려우므로 역로가 조잔(凋殘)하니, 이제 다시 마감(磨勘)하여 대·중·소의 역로 및 원근(遠近)을 나누어서 그 전의 역승을 각 역로에 차견(差遣)하여 1찰방마다 역승 1명을 더 두게 하소서. 삼가 뒤에 갖추 아룁니다. ..... 이인역·유양역·용전역·은산역·영유역·숙홍역·신곡역·두곡역·청화역·남전역 이상 10역은 이인도승(利仁道丞)으로 일컫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종실록』에는 “의정부에서 호서 이인역에 모인 동학 무리들을 안착하는 방도와 대부도의 복구 등을 아뢰다.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지난번에 호남선무사(湖南宣撫使)를 파견하는 일로 이미 초기로 아뢰어 윤허를 받았는데 방금 들으니 호서 이인역에 동학의 무리들이 매우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에는 “이인역에서 상환한 각곡 453석을 모두 분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역원은 육로 교통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역원에는 마필과 역정(驛丁)을 두어 공문의 전달 업무를 담당하고, 공무를 띤 여행자에게 필마를 제공하며, 숙식도 알선하였다. 그리고 지방에서 진상되는 공물의 수송 등 군사·행정상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은 중앙 집권적인 군현 제도를 강력하게 추구하였다. 개국 초부터 지방에 대한 중앙 통제를 쉽게 하고자 역원의 기능을 충분히 이용하기 위하여 전국의 역을 한양을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기록에 나타난 공주 지방의 역원으로는 이인역, 일신역, 광정역, 경천역, 단평역, 유구역 등 6개 역이 있다.
중종 때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원조를 보면, 이인역에 승이 있었으며 본도에 예속된 역이 9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인역에는 조선 초기부터 역승이 1명 주재하면서 9개 역을 관할하였다. 역승은 1535년(중종 30)부터 모두 찰방으로 대체되었다.
찰방은 역참을 감독하고 통제하며, 지방을 순찰하여 지방 관리의 직무 상황을 고찰하고 그 승출까지 맡아 보았던 관직이다. 정역찰방 또는 참역찰방이라 하며 역참의 일정한 지역을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하는데, 중앙의 명망 있는 문신들이 파견되어 ‘암행’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인역의 정확한 규모와 실태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조선 후기 제작된 지리지를 통해서이다. 그 이전 시기에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인역의 경우 규모가 거의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관련된 일을 보았던 역사(驛舍)의 규모나 역의 운영 실태는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히 파악할 수 없으나 1859년에 간행된 『공산지』와 조선 후기 문인들의 문집에서 이인역의 역루(驛樓)인 취병루(翠屛樓)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취병루는 『공산지』가 편찬될 당시 6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인역이 조선시대 부여에서 공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주요 교통로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갔고, 이들은 이 누각에 올라가 시를 읊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수광(李晬光)과 이경여(李敬輿), 김홍욱(金弘郁), 임상원(任相元), 오도일(吳道一) 등이 취병루에 올라 읊은 시가 그들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호남과 한양을 연결하던 요지에 있으며 9개 역을 관할하던 이인역은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없어졌는데, 역이 폐지되면서 당시 이인역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이인역이 폐지된 후 이인역 주변 주민들이 올린 청원서가 남아 있어 당시의 실정을 가늠해 볼 수 있다.
1904년(고종 8) 12월 공주 이인역에 사는 소작인 김경수 등이 역토(驛土)의 도조(賭租)를 본래의 총수(摠數) 외에 부족한 부분을 줄여달라고 청원하자 내장원(內藏院)에서 원도(原賭) 362석 외에 함부로 더 받는 폐단을 일절 금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05년 1월에는 이인역에 사는 강하원(姜河遠)이 수년간 경작해 온 토지를 새로운 마름이 탈경(奪耕)하고자 하니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내장원에 청원하자 봉세관에게 가서 아뢰라고 지시하였다.
1907년 3월에는 전(前) 이인역민 최중일 등이 누대에 걸쳐 이인역의 역토를 경작하면서 살아 왔는데 갑오개혁 때 역이 폐지된 후 소위 군파원(郡派員)·도마름·지마름 등 각종 허다한 직책들이 생겨나서 그 세력에 따라 도차(圖差)하여 소작인들을 교묘하게 농락하는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공세(公稅)를 납부하는 것은 피차가 마찬가지인데 하필이면 멀리 있는 다른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모두 경작하게 하고, 이인역 주민들이 경작을 요구하면 “너희들은 이 땅의 곡식을 다식(多食)했는데도 부족하여 욕심을 부리느냐”하면서 거절하였으며, 다시 간곡히 애원하면 “너희들이 감히 양반 앞에서 번거롭게 하느냐” 하며 꾸짖기 일쑤였다 한다.
해당 지역의 관리들에게 하소연해 보았으나 일이 경리에 관계되어 멋대로 처리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경리원에 등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요구 사항은 공주군에 속해 있는 이인역 역토를 이인에 사는 전 이인역민들이 균분하여 경작하게 하고,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 중에 믿음직하고 착실해서 맡길 만한 자를 마름으로 선택하여 도지를 거두어 상납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본도 관찰부에 훈령을 내려 주는 것이었다. 이에 경리원에서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소작인으로 삼은 곡절을 상세히 조사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위에 소개된 사례들은 이인역이 폐지된 후 역에 속해 있던 역둔토의 소작 문제를 둘러싸고 기존에 이인역에 속해 있던 역민들과 이를 관리하던 새로운 마름들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19세기 말 부재지주를 대신하여 토지를 관리하고 소작료를 징수하던 마름들의 횡포와 이로 인한 폐단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시대 이인역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은 1678년(숙종 4)에 발생한 송두인(宋斗寅)의 이인역 전패(殿牌) 파손 사건이다. 전패는 조선시대 지방 관청에서 임금의 초상을 대신하여 봉안하던 목패(木牌)로 지방에 출장한 관원이나 수령이 여기에 배례하였다. 만약에 훼손하거나 모독하는 경우에는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취급되어 본인은 물론 수령 및 그 고을도 처벌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충주목에서 전패를 파손한 일이 생겨 목이 현으로 강등되고 충홍도(忠洪道)·충공도(忠公道)로 개칭된 일이 있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성진(城津)과 길주(吉州)에서 같은 사건이 발생하여 성진첨사와 길주부사가 파면되기도 하였다.
1678년 6월 16일 의금부에서는 의금부도사를 파견하여 이인역의 전패를 파손한 죄인 송두인을 의금부로 붙잡아 올 것을 청하였으며, 6월 20일에는 유하익(兪夏益)이 이미 의금부로 잡아 온 송두인을 추국(推鞫)할 것을 청하여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그런데 사건은 송두인이 추국당하고 벌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4일 의금부에 갇혀 있던 송두인이 밤을 틈타 중방(中房) 아래에 구멍을 뚫고 목에 씌운 칼과 수갑을 풀고 담을 넘어 도망가 숨어 버린 것이다. 이 일로 당시 입직하던 도사(都事)는 물론 서리(書吏)·나장(羅將)·수직(守直)·순경군사(巡更軍士)까지 모두 관리 소홀로 문책을 당하였다.
이인역에는 찰방으로서 선정을 베푼 인물들의 선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현재 이인면사무소 앞에 있는 역대 이인찰방들의 선정비는 5기로, 본래 이인역 터인 이인초등학교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50년대 말 박승식 면장 재임 때 옛 면사무소 터로 옮겼다가, 1982년 면사무소 신축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그러나 5기의 선정비 중 행적이 확인되는 인물은 김제무(金濟懋)뿐이다.
『승정원일기』에 그의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본래 사근찰방으로 있다가 1883년(고종 20) 5월 14일에 이인찰방이 되었는데, 재임 기간 동안 선정을 베풀어 1885년 충청감사 박제관의 장계에 의해 유임되었다 한다.
김제무는 재임 기간 동안 황폐해진 이인역을 일으키고, 자신의 봉록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하여 궁벽한 시골에 굶주리는 근심이 없게 하였고, 재물을 모아 역마(驛馬)를 보충하여 각 역이 소생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 인하여 온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고 뭇 사람들이 그가 더 머물기를 원하여 호소문을 올렸다고 한다. 이에 박제관이 이같이 뛰어난 치적을 보고하면서 1과(瓜)에 한하여 유임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임금의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승정원일기』에는 선정을 베풀어 유임된 김조헌(金祖憲), 이순겸(李純謙), 안철영(安喆榮), 조병홍(趙秉弘), 최인식(崔仁植) 등 찰방 5명의 행적이 더 기록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법을 어겨 파직된 찰방들도 많았다. 『정조실록』 정조 4년 7월 19일 기사를 보면, 호서안핵어사 김이희(金履禧)의 서계(書啓)에 의해 전 이인찰방 홍창원(洪昌源)이 처벌을 받는 내용이 보인다. 당시에 위전(位田)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여 역참이 피폐해지는 폐단이 많았는데, 홍창원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병정이 멋대로 공전(公田)을 사전(私田)으로 바꾸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에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고 바꿔 준 역참의 전지는 곧바로 추심하도록 하였다.
[변천]
이인 지역에 역이 설치된 시기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기록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세종실록』세종 1년 4월 4일 무인조를 보면, “충청도감사가 이도역을 이인역으로 고칠 것을 주청하였다. 이는 임금의 이름과 음이 서로 같음을 피하기 위해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이인역의 명칭 유래는 물론, 세종 즉위 이전부터 이도역이라는 이름으로 역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편찬 당시 전국적으로 찰방 23, 역승 18의 체계로 총 537역이 운영되었다가 1535년(중종 30)에 역승을 없애고 모두 찰방으로 승격시켜 전국의 큰 역에 총 40명의 찰방을 파견하여 산하의 작은 역들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인역 또한 찰방이 주둔하면서 산하의 9개 역을 관할하였다.
이인역의 규모는 1759년경 『여지도서』가 간행된 이래 『충청도읍지』가 간행되는 영조에서 헌종 연간에 복마 1필이 추가된 이래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며, 갑오개혁으로 역원제가 폐지됨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공주의 역원으로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이인역을 통해 당시의 육로 교통 발달상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