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01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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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眞坪洞獨立萬歲運動 |
영어의미역 | Movement of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in Jinpyeong-d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인호 |
[정의]
1919년 3월 12일과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진평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인동 진평동에서는 3월 12일과 14일 두 번에 걸쳐 학생과 지역 유지들이 결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역사적 배경]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거를 시발로 비안·김천·포항을 거쳐 안동·경주 등지로 만세운동이 확대되어 나갔다. 구미 지역에서는 3월 12, 14일 인동, 4월 3일 해평, 4월 8일 임은동, 4월 12일 선산장터 등지에서 연속하여 시위가 일어나 도내의 만세운동과 발맞추어 나갔다.
[목적]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호응하여 구미시 인동 진평동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발단]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이었던 이영식(李永植)은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내성(李乃成)과 더불어 이곳의 유지인 이상백(李相栢)의 집을 찾아와 만세시위를 종용하였다. 이상백은 이에 찬동하여 인동에서도 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경과]
이상백 집에서 지역의 여러 동지들이 모여 거사를 의논하여 거사 일을 3월 12일로 약정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의거 당일에 사용할 태극기를 사전에 준비하였다. 12일 오후 8시 뒷산에서 300여 명의 동민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일 군경에 의해 주동 인물 8명이 검거되고 군중은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그러자 이영식의 동지로 같은 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金道吉)은 다시 진평동으로 들어와 이곳 청년들과 밀의하여 3월 14일 오후 9시 또다시 200여 명의 동민들과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2차에 걸친 진평동(眞坪洞) 만세시위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이상백(李相伯)·이내성(李乃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권영해(權永海)·이윤약(李允若)·장상건(張尙建)·장주서(張珠瑞)·서기옥(徐琦玉)·임삼선(林三先)·박근술(朴根述)·서천수(徐千壽)·박순석(朴順石)·김성윤(金性允)·박봉술(朴鳳述)·박삼봉(朴三鳳)·박명출(朴命出)·장영직(張永稷)·김삼주(金三周)·권경보(權景甫)·장준현(張浚鉉)·임동석(林東碩)·김도길(金道吉) 등이다.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이상백은 징역 2년, 이내성은 징역 1년 6개월, 이영래·임점석·임용섭·임용섭·박봉술은 각각 징역 1년, 박명언·권영해는 각각 징역 10개월, 그 외는 각각 징역 6개월을 언도받았다. 이들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영남 지역 만세사건에 있어서 첫 봉기를 촉발한 것은 학생층이었으나 3월 중·하순으로 가면서 차츰 군내의 면(面)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학생과 지방 지식인의 결합에 의해 일어난 진평동 독립만세사건을 통해 항일 저항의 저변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