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 신도비(1890)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39
한자 元陵神道碑(一八九零)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for Wonreung(1890)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원릉 신도비(1890)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694년 9월 13일 - 조선 영조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745년 11월 10일 - 정순 왕후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776년 3월 5일 - 조선 영조 사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05년 1월 12일 - 정순 왕후 사망
현 소재지 원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지도보기
성격 유적/비
양식 방부개석(方趺蓋石)
관련 인물 영조|정순 왕후|고종
재질 화강암[가첨석·농대석]|오석[비신]
크기(높이) 311.2㎝[전체]|58.0㎝[가첨석]|174.1㎝[비신]|79.1㎝[농대석]
크기(폭) 134.0㎝[전체·농대석]|117.9㎝[가첨석]|70.0㎝[비신]
소유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영조영조의 비 정순 왕후의 무덤인 원릉의 신도비.

[건립 연혁]

원릉 신도비(1890)는 1890년(고종 27)에 세워졌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따르면, 1890년 1월 3일 고종은 종묘에서 영종(英宗)의 묘호(墓號)로 영조 대왕(英祖大王)을 새롭게 올렸고 1월 27일에는 원릉 표석의 글을 직접 쓰겠다는 명을 내렸다. 이런 일들을 통해 신도비가 영조의 새로운 묘호 추상(追上)[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존호를 올리던 일] 과정에서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구성]

원릉 신도비(1890)는 화강암 재질의 가첨석(加檐石)[지붕돌]·농대석(籠臺石)[비석 받침돌]과 오석(烏石) 재질의 비신(碑身)으로 구성되었고, 전체 높이는 311.2㎝이며 폭은 134.0㎝이다. 가첨석의 높이는 58.0㎝이고 폭은 117.9㎝이며,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지붕 4면의 끝이 윗쪽으로 강하게 솟구쳐 경쾌한 느낌을 준다. 비신의 높이는 174.1㎝이고 폭은 70.0㎝이며,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다.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영조대왕원릉(朝鮮國 英祖大王元陵)'이라고 썼고, 새로운 묘호의 추상 과정 등을 기록한 뒷면의 음기(陰記)는 해서(楷書)로 썼는데 고종의 글씨이다. 농대석의 높이는 79.1㎝이고 폭은 134.0㎝이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가치 및 의미]

원릉 신도비(1890)는 1682년(숙종 8)에 건립된 영릉(寧陵)[효종(孝宗)과 효종의 비 인선 왕후(仁宣 王后)의 무덤]의 표석 이후 지속적으로 세워진 조선 왕실 무덤의 능표 중 하나이다. 능표의 양식은 점점 간략화되어 영조·정조 시기에 확립되었는데, 원릉 신도비(1890)는 앞 시기에 확립된 양식이 잘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18세기 정조 이래 국왕이 직접 왕실 무덤의 비문을 쓰는 사례가 늘어나는데, 원릉 신도비(1890)는 그 맥을 잇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