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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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英祖 |
영어공식명칭 | Yeongjo |
이칭/별칭 | 연잉군,양성헌,영종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에 묻힌 조선 후기의 왕.
[개설]
영조(英祖)[1694~1776]는 조선의 제21대 왕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가계]
영조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肅宗)의 둘째 아들이며,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淑嬪) 최씨이다. 1704년(숙종 30)에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 왕후(貞聖王后)와 혼인하였으며, 정성 왕후가 사망한 후인 1759년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 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았다. 정비인 정성 왕후와 정순 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으며, 후궁과의 사이에서 2남 7녀를 두었다. 아들인 효장 세자(孝章世子)와 사도 세자(思悼世子)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손자 정조(正祖)가 그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영조는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 영조의 형인 경종이 아들도 없고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노론을 중심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격화되던 시기에 한 붕당의 지지만으로 왕세제가 된 연잉군의 지위 역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경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노론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소론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1721년 신축 옥사와 이듬해의 임인 옥사, 이른바 신임사화(辛壬士禍)가 벌어지며 노론 4대신을 비롯한 영조의 지지 세력은 역모죄로 처형되거나 축출되었다. 연잉군의 지위도 위태하게 되었으나, 결국 1724년 경종이 죽자 조선의 제21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세제로 있으면서 붕당 간 대립의 폐해를 직접 겪었던 영조는 즉위한 후 탕평 정치를 표방하며 붕당의 폐해를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각 붕당의 강경파인 준론계(峻論係) 인물을 멀리 하고 온건파인 완론계(緩論係)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는 이른바 완론 탕평을 펼쳤다. 그러나 1728년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고 1755년에는 나주 괘서 사건이 발생하는 등, 영조의 왕위 계승에 대한 부정과 탕평책에 대한 반발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붕당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영조의 개인적인 비극인 임오 화변으로 이어졌다.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 세자는 1728년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사도 세자[장헌 세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1749년(영조 25)부터는 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여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도 세자는 노론과 반목이 있어 여러 차례 노론의 비판에 직면하였고, 부왕 영조와의 사이 또한 좋지 않아 수시로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결국 사도 세자는 정신 질환의 증상을 보여 기행을 보였다. 1761년 정순 왕후의 부친인 김한구 등이 상소하여 세자의 비행을 고하자 결국 영조는 나라를 위해 사도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하였고, 명령에 응하지 않자 뒤주에 갇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붕당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때로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영조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여러 시책을 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는 이조 낭관의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는 등 기존의 정치 제도를 개혁하려 하였으며,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의 폐단을 없애려 하는 등 사회 경제 개혁에도 앞장섰다. 특히 영조는 몸소 홍화문에 나가 오부 방민(五部坊民)을 만나 여론을 파악하는 등 민생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고 신문고를 부활시킨 것이나, 행차 도중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을 활발하게 이용한 것 등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조는 탕평 정치와 각종 개혁책을 통해 당시 산적해 있던 조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하였고, 이는 손자 정조에게 계승되었다.
[저술 및 작품]
영조는 군사(君師)를 자처할 정도로 학문에 힘썼으며, 스스로도 저술을 많이 남겼다. 「영종 어제(英宗御製)」·『영종 어제 속편(英宗御製續編)』·『어제 집경당 편집(御製集慶堂編輯)』·『어제 속 집경당 편집(御製續集慶堂編輯)』 등 많은 분량의 어제서(御製書)를 남겼다.
[묘소]
영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원릉은 영조와 계비 정순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태이다. 정자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영조의 능이며, 오른쪽이 정순 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재위 당시 왕릉의 제도를 정비하였고, 이 결과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원릉의 석물 등은 모두 『국조상례보편』의 체제를 잘 따르고 있다. 영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정성 왕후는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내에 있는 홍릉에 묻혀 있다. 영조는 정성 왕후를 위해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도 이후 이곳에 쌍릉의 형태로 묻히고자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나, 1776년에 영조가 사망하자 손자 정조가 현재 원릉 자리에 모셨다. 1805년 정순 왕후가 승하한 후, 쌍릉 방식으로 영조의 옆에 묻히게 되어 현재 원릉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1970년에 동구릉 전체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영조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