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00 |
---|---|
한자 | 義兵運動 |
영어공식명칭 | Righteous Army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성환·이성운 |
[정의]
1895년에서 1910년 사이 해남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개설]
해남 지역은 비옥한 토지와 연안 지역의 어업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 많은 곳으로 타 지역에 비해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심하였다. 내륙에서 활동한 의병들이 해남 지역까지 내려와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지역 주민들도 적극 의병 활동에 가담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은 정석진(鄭錫振), 심남일(沈南一), 이덕삼(李德三), 황준성(黃俊聖), 황두일(黃杜一), 추공엽(秋珙燁) 등으로, 많은 의병 부대가 활동하였다.
[해남 지역의 의병과 주요 활동-전기와 중기]
해남의 의병 활동은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 의병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정석진(鄭錫振)이다. 정석진은 1895년(고종 32) 음력 2월 9일 해남군수에 임명되었지만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벼슬을 버리고 기우만(奇宇萬)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또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과 함께 나주향교의 유생들에게 거의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전기 의병이 해산되고, 1896년 3월 관군대장 김병욱(金炳郁)에게 생포된 후 죽음을 당하였다. 정석진은 나주 이속 출신으로 나주 의병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해남에서 활동하지 못한 이유는 해남군수로 부임하였지만 짧은 재임 기간으로 의병운동 동조자를 찾기 어려웠고, 이 시기 호남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지는 나주와 장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수의 의병 활동은 해남 지역민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중기·후기 의병 활동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중기 의병 활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시작되었다. 중기 의병 당시 해남의 의병 활동은 문헌상에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최익현(崔益鉉)의 이름으로 작성된 격문이나 선유위원 조철구(趙鐵九)의 선유 활동 노선에 해남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의병 활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인(泰仁) 의병을 준비하던 최익현과 임병찬(林炳贊), 기우만 등 호남 지역의 대표 유생 50여 명이 대일 항전의 방법을 논의하였다. 의병을 일으키자는 데에 모두 동의하여 최익현의 이름으로 격문을 지어 각 군에 발송하였는데 이 격문에 해남이 언급되었다. “종실, 세신(世臣), 관찰사, 수령 및 선비, 농부, 공장(工匠) 등 일제히 분기하여 마음과 힘을 합쳐 원수 오랑캐를 무찔러 그 종자를 없애고 (중략) 위 격문을 삼가 순천, 낙안, 홍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강진, 해남, 완도에 통고한다.” 또 선유 활동에 해남이 나타난다. 중기 의병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지방관들로 하여금 해당 지역의 선유 활동에 나서게 하였다. 기존 관찰사가 선유사를 겸하면서 각 군에 선유 활동을 하였지만 토포사(討捕使)라는 비판을 받아 정부는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에 걸쳐 선유사를 선유위원이라 칭하고 각 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군청소재지의 객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시 등에서 면리장(面里長)과 주민들을 상대로 선유조칙(宣諭詔勅)을 낭독하고 의병의 해산과 귀순을 권유하였다. 또한 주막이나 동리에 선유를 권고하는 고시문을 게시하거나 자위단의 창설을 지원하고 의병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 반(反)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일본인 순사나 헌병의 호위를 받아가며 선유 활동에 종사하였다. 전라남도의 선유위원으로 임명된 조철구는 인천을 떠나 목포항에 도착한 후 무안-나주-광주-장성-담양-창평-동복-옥과-곡성-구례-광양-순천-낙안-보성-장흥-해남 순으로 돌며 선유 활동을 펼쳤다. 조철구가 해남을 방문해 선유 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해남에 의병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해남 지역의 의병과 주요 활동-후기]
후기 의병 활동은 전라남도에서 주도하였다. 그 배경은 민중의 반일의식이 1907년 가을 이후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또한 물산이 풍부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경제적 수탈도 그만큼 가혹하였다. 이것이 반일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하게 된 동기다. 호남의병은 1908~1909년에 한말 의병전쟁을 주도하였으며, 처음에 장성·나주 내륙지방에서 연해 도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도서 지역까지 확산된 의병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는 수비대 병력을 증강하였다. 1909년 1월에 완도를 비롯한 인근 도서 지역에 수비대를 출동시켰고, 2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해남 지역의 의병을 진압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진압에도 호남의병은 불굴의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전라도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는데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년 9월~10월]이다. 해남에서 의병 활동은 크게 ‘심남일 의병부대의 활동’, ‘유배인들의 의병 활동’,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이 있다.
심남일(沈南一)은 1908년 3월 말에 의병장 김율(金聿)이 일제에 체포되자 흩어진 의병들을 모아 새로운 의병 조직에 나섰다. 심남일 의병부대의 항일투쟁은 1908년 음력 3월부터 1909년 7월까지이며, 활동무대는 나주, 함평, 화순, 영암, 장흥, 강진, 해남 등이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본거지를 한 곳에 두지 않고 나주와 강진을 오가며 전라남도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0월 9일 해남 성내에 있는 헌병대를 야간 기습하여 일본군 100여 명을 살상하였으며, 영암과 해남 등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보는 대로 죽여 일본 상인과 거류민이 도망가기도 하였다. 또한 해남군 송지면에 있는 일진회 사무소를 파쇄하고, 일제의 토지 수탈과 토지 수탈을 위한 측량학교를 모두 폐지하였다. 내륙에서 활동한 호남의 의병들은 대부분 일제의 진압에 의해 남쪽 연안과 도서 지방으로 이동했다. 이처럼 1909년 도서 지방이 호남의병의 주된 활동무대로 바뀌자, 해당 지역에 정배된 유배인들이 유배지를 이탈하여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10년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은 유배인들이었다. 과거 의병 전력을 인정받아 대부분 주요 직책을 맡았다. 해남과 완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은 이덕삼(李德三), 황준성(黃俊聖), 황두일(黃杜一), 추공엽(秋珙燁) 등이다. 이덕삼은 1909년 3월에서 7월 사이 약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이 되었고, 황준성을 부장, 황두일을 중군장, 추공엽을 전군장, 강성택을 부장으로 하여 해남, 영암, 완도 등지에서 일본 군경과 일본 거류민들을 주로 공격하였다. 유배인들과 더불어 지역민도 의병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1909년 도서 연안 주민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로 인하여 생계를 위협당하자 의병에 가담하였다. 결국 도서 지방에서는 의병 출신 유배인들의 지도력과 도서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합쳐져서 의병봉기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의병부대는 항일투쟁 외에도 일제의 징세를 방해하거나 친일 관리의 처단 및 일진회원의 제거에도 적극적이었다.
대표적으로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은 1909년 7월 8일 황준성(黃俊聖), 황두일(黃杜一), 추공엽(秋珙燁)의 의병부대가 일진회 회원 박원재(朴元在)와 일본 헌병의 밀정인 진태진(陳泰鎭)을 해남군 현산면 초평리에서 처단하고 일제의 급습을 받은 사건이었다. 1909년 7월 8일 밤 10 경 해남 대흥사에 집결하여 있던 황준성 의병부대는1909년 7월 9일 새벽 4시~4시 30분 경 요시하라 대위 이하 7명의 일본 헌병 및 경찰을 포함한 20여 명의 의병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약 2시간 30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의의와 평가]
해남은 우리나라 마지막 의병 투쟁지이자 의병들이 순절한 장소이다. 호남의병들은 해남과 완도, 진도에 있는 연안 역과 도서 역에서 끝까지 항쟁했다. 또 항일운동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생존권 보존과 경제적 안정 및 보호의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