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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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興寺深寂庵義兵運動 |
영어공식명칭 | Daeheungsa Simjeogam Righteous Army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성환·이성운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09년 07월 08일 -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 일진회 회원 박원재와 일본 헌병의 밀정 진태진을 해남군 현산면 초평리에서 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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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09년 07월 09일 -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 새벽 4시~4시 30분 경 일제의 의병 토벌대와 전투 |
발생|시작 장소 | 해남 대흥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발생|시작 장소 | 해남 미황사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서정리 1] |
종결 장소 | 해남 대흥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
성격 | 항일 의병운동 |
[정의]
1909년 7월 해남 대흥사 심적암에서 일어난 항일 의병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호남 지역을 경제적 침략의 요충지로 여겼다. 전라남도 서남부 해안 및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일찍이 많은 일본 상인, 농업 경영자, 어업종사자들이 들어와서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은 고조되었다. 이 시기에 의병운동 관련자들이 서남해 도서 지방에 유배되어 있었으며,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시달리던 토착 주민들은 의병들과 접촉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의 주역이었던 황준성(黃俊聖)은 1908년 1월 28일 의병운동[내란죄]으로 10년 유배형에 처해져 완도에 정배되었다. 1909년 6월 황준성은 유배지를 탈출하여 완도군과 해남군 화이면[현 화원면]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7월 7일 해남군 북종면[현 북평면] 이진리에서 추공엽(秋珙燁)·황두일(黃斗一)의 의병 부대에 의해 수장(首將)으로 추대되었다. 황준성은 황두일·추공엽 등을 부장으로 임명하고 휘하의 의병 150여 명으로 부대를 정비하였다.
[경과]
1909년 7월 8일 황준성 의병 부대는 해남 미황사 및 대흥사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중 일진회 회원 박원재(朴元在)와 일본 헌병의 밀정인 진태진(陳泰鎭)을 해남군 현산면 초평리에서 처단하였다. 1909년 7월 8일 밤 10시 경 해남 대흥사에 집결하여 있던 황준성 의병 부대는 7월 9일 새벽 4시~4시 30분 경 요시하라 대위 이하 7명의 일본 헌병 및 경찰을 포함한 20여 명의 의병 토벌대의 급습을 받아 약 2시간 30분 동안 전투를 하였다.
[결과]
전투 결과 의병 약 70명 중 24명이 희생당하고, 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화승총과 군도 등 무기를 압수당했다. 황준성, 추공엽, 황두일은 탈출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 토벌대의 피해는 없었다. 심적암 의병 전투 이후 황준성은 일제를 피해 보성, 순천 등지로 이동하면서 은거하던 중 1909년 12월 7일 체포되었다. 이후 1910년에 일제에 의해 사형당하였다. 추공엽은 의병 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1909년 7월 18일 부하들에게 피살당하였다. 황두일의 행적은 심적암 의병 전투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대흥사 심적암 의병운동으로 인해 해남 지역민들의 사회의식,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지면서 1919년 3·1운동과 1935년대 전남운동협의회 결성 참여 등 여러 방면으로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