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646
한자 西山大師
영어공식명칭 Seosandaesa
이칭/별칭 최여신(崔汝信),현응(玄應),청허(淸虛),휴정(休靜),백화도인(白華道人),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20년연표보기 - 서산대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서산대사 법계(法戒)를 받음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서산대사 전국에 격문을 돌려 의승을 모아 평양성 탈환에 기여
몰년 시기/일시 1604년연표보기 - 서산대사 입적
추모 시기/일시 1630년 - 묘향산 보현사에 서산대사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32년 - 금강군 백화암에 서산대사탑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47년 - 해남 대흥사 부도전에 서산대사탑과 탑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789년 - 서산대사를 기려 해남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 건립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시 - 평안남도 안주시
활동지 대흥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지도보기
활동지 보현사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활동지 칠불암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성격 승려|의승장
성별
대표 경력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

[정의]

조선 후기 해남 대흥사에서 활동한 승려.

[개설]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의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속명은 최여신(崔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법명은 휴정(休靜)이다. 별호는 서산대사·백화도인(白華道人)·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다. 임진왜란 때 전국에 승첩을 돌려 승군을 조직하고 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활동 사항]

서산대사는 1520년(중종 20)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華嚴經)』·『원각경(圓覺經)』·『능엄경(楞嚴經)』·『유마경(維摩經)』·『반야경(般若經)』·『법화경(法華經)』 등을 읽으며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각지를 떠돌며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며 물러나 금강산·두륜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다니며 수행하였으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가 무죄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를 불렀다. 이에 서산대사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었고,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서산대사는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이후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서산대사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서산대사의 선교관(禪敎觀)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닦으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성도문(聖道門)에 입각하고 있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雲水壇)』·『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 등이 있다.

[묘소]

대흥사, 보현사(普賢寺), 안심사(安心寺), 유점사(楡岾寺)에 서산대사 부도가 건립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는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고, 해남 대흥사와 강원도 금강군 백화암에 서산대사의 비가 건립되었다. 서산대사의 호국충혼을 추모하는 국가의 제사인 서산대제대흥사 표충사(表忠祠), 보현사 수충사(酬忠祠)에서 봄가을에 봉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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