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1361
한자 世界遺産大興寺-西山大師
영어공식명칭 World Heritage Daeheungsa Temple and Seosandaes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대흥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지도보기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서산대사.

[개설]

해남 대흥사두륜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가련봉과 두륜봉을 상봉으로 하는 조계봉,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등의 두륜산 경치는 장관을 이룬다. 해남 대흥사는 2009년 12월 21일 사적 제508호로 지정되었으며,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2009년 12월 9일 명승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대흥사는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하며, 9세기 후반에 선종 사찰로 중건된 한국 불교의 호국신앙을 상징하는 사찰이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의발이 전수되면서 17~18세기 서산종의 종찰로 선·교 양종의 대도량 역할을 한 사찰이다. 경내에는 국보 제308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국가지정 문화재 12점과 전라남도지정 문화재 9점, 그리고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의 승탑과 비석들이 있는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이다. 대흥사는 창건 이후 지속적으로 사세를 유지해 오다가, 16세기 임진왜란 때 사찰 전체가 소실되었는데, 대웅전 구역의 응진전 앞에는 9세기 통일신라 때 유물로 추정되는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이 이전 시기의 역사적 증거로 남아 있다. 1603년과 1665년에 전후 재건 기록이 있다. 1667년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창하고 전각이 들어선다. 이후 사역이 확장되며 천불전 등이 들어서게 된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대표적 승병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들의 호국 충정을 기리기 위해 1789년 사당인 표충사(表忠祠)[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가 건립되며, 호국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일주문의 “선림교해만화도량”이 적힌 현판과 승탑원의 많은 승탑에 보듯이 대흥사는 13대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의 명성을 유지한다.

[가람 배치와 공간 구조 -계류형 산사, 북원과 남원]

대흥사의 가람 배치 공간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계류를 사이에 두고 네 영역이 공존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대흥사는 입지 특성에 맞추어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원과 남원으로 나눠지는 계류형 산사이다. 북원에서 시작해서 점차 전각들이 들어서면서 남원 구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북원은 대웅전 1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원은 천불전 구역, 표충사 구역, 대광명전 구역의 3개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영역마다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은 대흥사의 영역 구성은 자연 지세에 따라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비대칭적으로 사찰의 영역을 확대한 형태이다.

북원은 금당천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침계루로 진입하게 된다. 마당을 중심으로 주불전인 대웅보전과 좌우의 요사채, 침계루가 사면 배치를 이루고 다시 보조불전인 응진전과 요사채가 확장된 구조이다. 북원의 주요 건물은 대웅보전, 응진전과 산신각, 침계루이며, 9세기 삼층석탑도 있다. 요사채 건물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다. 침계루는 북원으로 출입하기 위한 진입문이자 2층은 불교의 사물이 있는 범종루이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를 봉안하고 있는 대흥사의 주불전이며, 1667년 중창하였다는 『대웅전 중건기』 기록을 통해 대웅보전이 그 이전에 창건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 현판은 18세기 중엽의 유학자이며 명필이었던 이광사가 쓴 것이다. 대웅보전의 석가여래삼불좌상[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863호]은 1612년에 조상하였다. 전란 과정에서 의승군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던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1606년에 봉안되고 6년 뒤에 이루어진 불사였는데, 대형 불상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불사였다. 「소성복장기(塑成腹藏記)」에는 태전을 비롯한 10명의 조각승, 불상 제작에 필요한 시주물목이나 참여하였던 380여 명의 사부대중을 기록하고 있어 불상의 가치를 한 층 높여 준다.

남원의 천불전 영역은 천불전[해남 대흥사 천불전, 보물 제1807호]과 가허루 등 예불 공간과 함께 봉향각과 용화당 등 승려들의 수행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천불전은 「천불전조성약기」에 따르면 1811년의 화재로 피해를 입은 뒤 1813년에 중건되었다. 천불전에는 목조 삼존불과 석조 천불상을 봉안하였다. 천불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천불이 있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이 존재하며,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천불은 모두가 각각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특히 경주에서 조성하여 해남으로 오던 배 두 척 가운데 한 척이 풍랑을 만나 일본에 표류하였다가 돌아오는데, 강진에서 유배살이 하던 다산 정약용이 일본 표류한 불상은 일(日) 자를 표기하도로 대흥사 승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서산대사와 표충사 -종교적 개방성]

표충사 영역에는 표충사와 조사전, 의중당 등 서산대사서산대사의 제자들을 기리는 여러 전각이 있다. 표충사는 조선시대 일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 처영대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표충사는 한국의 호국불교 사상을 상징한다. 불교사찰 안에 유교식 사당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흥사의 종교적 개방성을 잘 보여 주는 실례이다. 표충사는 1791년에 기록된 「표충사창건기」에 따라 1789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국왕인 정조가 내린 ‘표충사’ 편액이 걸려 있다. 이를 통해 국가공인 사우라는 것은 알 수 있고 표충사의 역대 제관은 왕명에 따라 인근 고을 수령들이 맡았다. 제관으로 임명되었던 관리들의 명단인 「제관명단」 등 조선시대 기록도 남아 있다.

표충사 건물이 노후하여 1836년에 대웅보전 뒤로 옮겨 지었는데 대웅보전을 내려 보는 위치여서 1861년에 현 자리로 표충사 건물을 옮긴 사실이 「표충사중이구지기」에 기록되어 있다. 1791년에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와 1792년에 표충사 건사 사적비가 건립된다. 국난이 있을 때 크게 의병, 승병, 중국 명나라 지원병이 국가를 지켰다. 특히 승병은 서산대사와 제자들만 5,000명 이상이 전투에 참여하여 그 비중이 컸다. 효와 충을 강조하는 국가에서 충효에 대한 표창을 해야 지속적으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서산대사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건립해 주었다. 표충사는 국가적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지방관리가 제사를 모시고 있으며,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산대사 유물 가운데 정선사가록은 현재 남아 있는 서산대사의 유일한 친필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1667호,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西山大師行草精選四家錄)』]. 화상당명병서는 정조가 서산대사의 공적을 찬탄하는 내용으로 정조의 친필이다. 선조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서산대사에게 조선팔도의 의승병을 총지휘할 수 있는 정3품의 벼슬을 내리는 교지도 있다. 화상명병서와 교지는 보물 제135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海南大興寺西山大師遺物)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가 제자에게 법맥을 전한다는 의미로 전해진 금란가사와 발우는 지방문화재이다[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6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의발 등 유물 일괄(海南大興寺西山大師衣鉢等遺物一括)].

대광명전 구역은 대광명전과 동국선원 등 스님들의 수행 및 생활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3대종사 중 마지막 종사인 초의 의순 대종사는 대흥사 일지암에서 40여 년 간 생활하면서 『다신전』, 『동다송』 등을 지어 우리 차에 대한 모든 과정 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선 수행과 차는 하나라는 다선일미사상을 확립시켜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준제관음보살도」와 「십일면관음보살도」는 초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흥사 성보 유물 유적]

해남 대흥사는 사적 제508호, 두륜산 대흥사 일원은 명승 제66호이다. 경내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 제308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301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보물 제320호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 보물 제134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탑, 보물 제1357호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 보물 제1547호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보물 제1552호 「해남 대흥사 영산회 괘불탱」, 보물 제1807호 해남 대흥사 천불전, 보물 제1863호 해남 대흥사 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제52호 대흥사 천불상, 유형문화재 제93호 대흥사 용화당, 유형문화재 제94호 대흥사 대광명전, 유형문화재 제179호 「대흥사 관음보살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문화재자료 제245호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동삼층석탑, 문화재자료 제246호 해남 대흥사 만일암지 오층석탑이 있다. 승탑전에는 58기의 승탑과 18기의 탑비가 있으며, 대흥사 사적비도 있다. 서산대사비는 1642년에 제작되었다.

[한국의 산지 승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대흥사는 2018년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 사찰에 들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대흥사는 9세기 후반에 선종 사원으로 창건되었으며, 대웅전 구역에서 계류를 건너 천불전구역, 표충사 구역, 대광명전 구역으로 사역이 확대된 산사로서, 석가신앙과 표충사의 호국신앙을 계승하고 선교 교학전통의 중심을 이룬 특징이 평가를 받았다.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은 한국 불교의 개방성을 사찰 내 공간 구성에 반영하며, 신앙·수행·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종합 승원으로서, 산사 유형을 대표할 수 있는 7개 사찰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이다. 7~9세기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대승불교의 다양한 종파를 수용하여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당시 사찰이 수도인 경주 등 도시에 위치한 것과 달리 신청 유산은 산지에 창건되었다. 조선 전기에 불교를 억압한 국가정책으로 수도 등 도시 사찰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신청 유산 등과 같은 산지 사찰은 신앙·수행·생활을 유지하는 종합승원의 성격을 유지하며 존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산사는 7~9세기 창건 이후 신앙, 수행, 생활이 현재까지 온전하게 유지되어 온 불교의 종합승원이라는 점과, 주불전의 원지형이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유지되며 개방적 공간인 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마당이 주위 건물과 주변 환경과의 유기적 관계를 잘 보여 주는 살아있는 유산이라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다른 불교 유산들과 불교 관련 요소를 포함하는 기 등재된 한국의 다른 세계유산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유산이다.

대흥사는 9세기 후반에 선종 사찰로 창건된 산사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이 한국불교의 계류형 다중 공간 구성과 호국신앙을 대표하는 산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흥사두륜산 기슭의 대흥사천 옆으로 펼쳐진 지형에 창건되었고,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계류를 건너 남쪽으로 입지를 확대하여 오늘날의 규모에 이르렀다. 처음 대웅보전이 있는 북원 영역에서 창건하여 점차 계류를 건너 남쪽으로 확장되었고, 19세기까지 현재의 공간 구성 요소가 모두 갖추어졌다.

종합승원으로서 대흥사는 출가자와 신도들을 위한 신앙과 수행, 생활공간의 다양한 건축물이 있다. 신앙 공간으로는 대웅보전, 명부전, 응진당, 천불전, 대광명전이 있다. 또한 한국 산사의 대표적인 속성인 토착신앙과의 융합을 보여 주는 산신각과 표충사, 조사전이 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1592~1598] 때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와 함께 세운 사당으로서 사찰에서 보기 드문 솟을삼문을 갖추었다. 이는 사찰에 유교적인 애국 관념을 포용한 융합성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 대흥사에서는 18세기에 서산대사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표방한 뛰어난 승려들이 배출되어 한국불교를 선도하였다. 수행 공간으로는 동국선원, 용화당이 있다. 동국선원은 선 수행의 공간이며, 용화당은 강원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생활 공간으로는 백설당, 대향각, 정행당, 신해당, 안심당, 청운당, 봉향각, 일로향실, 적묵당, 세심당, 정진당, 심검당, 문수전, 보현전, 보련각, 강례재, 의중당, 벽안당, 수심당, 종무소, 동다실이 있다. 대부분은 승려들의 생활 공간으로 쓰이며 동다실은 일반인들이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대흥사는 석가신앙이 중심이지만 독특한 신앙으로 표충사의 호국신앙이 있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들을 제향하기 위해 국가의 인정을 받아 1789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표충사에서는 국가에서 파견된 관리가 유교식 제향을 거행했다. 오늘날에도 서산대사를 기리는 의례가 거행된다. 표충사는 불교에 유교적 호국신앙이 융합된 특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대흥사 공간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계류를 사이에 두고 네 영역이 공존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대흥사는 네 영역마다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남원의 천불전 영역, 표충사 영역, 대광명전 영역은 담장을 둘러 구분하였다. 북원 영역은 마당을 중심으로 대웅보전과 좌우 요사채, 침계루가 사면 배치를 이루고 다시 보조불전과 요사채가 확장된 구성이다. 북원에서 계류를 따라 조성된 남원의 천불전 영역은 가허루와 천불전이 있고 마당 좌우에 봉향각과 용화당이 있다. 천불전 영역의 남쪽 표충사 영역은 솟을삼문 안에 표충사와 조사전, 표충비각이 있고, 표충사 영역 동쪽에 대광명전 영역이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대흥사의 영역 구성은 자연 지세에 따라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비대칭적으로 사찰의 영역을 확대한 형태이다.

대흥사의 특징적인 불교 행사는 서산대재(西山大齋)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구국활동을 벌였던 서산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치르는 제향의식으로 조선시대부터 거행되어 온 것이다. 대흥사서산대사의 유훈을 받들어 조선 후기 불교계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 전통을 현재에도 이어 나가는 중요한 의례이다. 대흥사는 유학자들과의 교류도 많았는데, 명필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 등의 현판에서 그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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