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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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가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삼한 시기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위치하였던 정치 집단인 아라가야(阿羅伽耶)는 고대 함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의 핵심이다. 아라가야는 전기에는 변진 안야국(弁辰安邪國)으로서 중국에 알려질 정도로 유력한 정치 집단이었던 것으로 『삼국지(三國志)』에 기록되어 있고, 광개토 대왕(廣開土大王) 비문에도 '안라'라는 이름으로 아라가야가 존재하고 있다. 6세기에 해당하는 『니혼쇼키[日本書紀]』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欽明紀)에는 안라국(安羅國)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아라가야는 가야 전 시기에 걸쳐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라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의 군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신라는 아라가야를 멸망시킨 후 함안 지역에 성을 쌓고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신라의 아라가야 점령은 낙동강 수계의 완전 확보 및 독점적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라는 경주의 앞면을 흐르는 낙동강이라는 수운을 유효적절하게 운용하여 공납의 수수와 분배를 하였다. 6세기 말에 이르면 함안 지방도 신라 지배 체제에 포함되어 왕도 경주의 역역(力役)에 동원되는 지방 행정 체계에 편입되었다.
[아라가야의 형성]
아라가야는 삼한 시기 변한(弁韓)에 속하였던 12개 나라들 중의 하나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국명은 달랐다. 전기의 국명은 기원전 1세기 말경에 지금의 함안 칠원 지역을 제외한 함안 지역에 형성되었던 변진 안야국이다. 안야국 형성의 전 단계에서 보여 주는 함안 지역은 고인돌 분포로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김해 지역의 구간(九干) 사회나 경주의 6촌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08년 위만 조선(衛滿朝鮮)의 몰락으로 인한 유이민의 남하로 진한과 변한이 형성되었는데, 함안 지역에 형성된 것이 안야국이었다. 함안 지역에서 조사된 기원전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널무덤[목관묘]은 안야국의 형성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안야국이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께 변한 제국 중에서도 유력한 나라였음을 『삼국지』의 '가우호(加優呼)'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의 분포나 1~3세기 대 유적의 분포로 보아 현재의 함안 가야읍·함안면 지역과 군북면이 안야국의 중심 세력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함안 가야읍 지역이 그 이후 유적의 계승 관계로 보아 안야국의 중심 읍락인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변한 제국은 주로 중국 군현과의 교역 즉 선진 문물의 수입을 통하여 성장하였으나, 3세기 전반에 후한이 멸망하고 위·촉·오의 삼국 시대가 전개됨에 따라 중국 본토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음으로써 교역을 통한 성장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변한의 여러 나라들은 성장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것이 3세기 말경 발생한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포상팔국 전쟁은 아라가야의 인근에 있었던 해안가의 골포국(骨浦國) 등 여덟 나라가 내륙으로의 진출을 도모하기 위하여 함안 지역과 벌였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아라가야는 포상팔국의 침입을 막아 냄으로써 정치적 성장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즉 4세기 대 함안식 토기의 분포권이 가야읍 지역과 군북면 지역을 벗어나서 확대되고 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포상팔국 지역의 일부가 아라가야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됨으로써 아라가야는 바다를 통하여 자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농업 조건 외에 바닷길을 통한 인근 국가와의 교역도 원활하게 되었다.
광개토 대왕의 남정도 아라가야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400년 고구려광개토 대왕의 가야 지역 진출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 광개토 대왕 비문에 세 차례 등장하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은 아라가야가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가 왜의 신라 침략에 대하여 신라를 지원하기 위하여 5만의 군사를 파견하였던 이 전쟁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김해 지역의 임나가라(任那加羅) 등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게 되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전쟁 과정에서 오히려 고구려·신라와 연합함으로써 가야 지역에서 진행된 위기를 주체적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5세기 전반대로 보여지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은 아라가야의 정치적 발전을 보여 주는 근거이다.
[아라가야의 발전과 멸망]
아라가야는 5세기 대 고구려의 가야 지역 침략을 계기로 급성장하였다. 5세기 대의 사실이 기록으로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령의 대가야가 중국남제(南齊)와의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라가야도 대가야에 견줄 수 있는 정치적 발전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이 이것을 대변하고 있으며, 함안의 전형적인 토기 유형인 불꽃무늬 굽구멍 토기[화염문 투창 토기]의 분포를 보아서도 아라가야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함안 칠원 지역이나 의령의 남부 지역과 창원 진동의 일부 지역이 아라가야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함안 지역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산성은 아라가야의 확대된 영역을 방어하는 시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영역의 확대는 아라가야의 정치적 발전을 가져왔다. 아라가야의 최고 지배자는 왕(王)을 칭하였고, 왕 아래에 다수의 차한기와 하한기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아 지배층이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배층의 분화는 아라가야의 정치적 발전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라가야가 가야 제국의 '형'이나 '아버지'로 불리어지며 6세기 대의 대외적 활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6세기 대의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가야 지역 진출을 방어하는 데 가야 제국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백제의 가야 지역 진출에 대하여 묵시적으로 동조하기도 하였지만, 백제가 섬진강 하류인 대사[하동] 지역에 진출할 즈음에는, 백제와 신라의 아라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라가야 주도로 고당(高堂) 회의를 개최하였다. 또한 아라가야에 머무르고 있었던 왜의 사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아라가야는 가야 제국과 백제 사이에서 541년과 544년의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사비 회의에 대가야·다라 등 7~8개 소국 대표들과 함께 참여하여, 백제에게 가야 제국의 독립 보장과 신라의 가야 지역 공격에 대한 방비책을 요구하는 등 가야의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러한 아라가야의 대백제·신라에 대한 외교 정책은 백제와 신라의 끈질긴 가야 지역 진출 욕구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더 이상 백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아라가야는 백제의 군사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즉 아라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이었던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패배하게 됨으로써 가야 각국은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백제가 더 이상 가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둘 수 없게 되면서 신라는 본격적으로 가야 지역을 공격하게 되었다. 결국 아라가야도 신라의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여 560년경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아라가야의 멸망은 가야 각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2년 후에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지역의 모든 나라들도 신라에 의해 정복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의 함안]
아라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한 후 아시량군이 되었고, 경덕왕(景德王) 대에 함안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은 9주 5소경제로 편제되었는데, 함안은 청주(菁州) 즉 강주(康州) 소속으로 편제되었으며, 함안군에 소속된 현은 현무현(玄武縣)[함안군 군북면]과 의령현[의령군 의령읍]의 둘이었다. 또한 통일기의 군사 제도는 국왕 중심의 집권화에 적합한 방향으로 정비되면서, 함안 지역에도 10정 중의 하나인 소삼정(召彡停)이 설치되었다. 소삼정은 지금의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일대에 해당한다. 10정은 통일 이후 지방에 배치된 군단 가운데 핵심적인 군단이며, 기병 중심의 부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