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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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
[개설]
함안 지역은 경상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두 강의 유역에는 넓은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에서 함안 지역은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였다.
[선사]
함안 지역에서 사람이 산 흔적은 구석기 시대부터 있다. 2003년 칠원 용산리와 가야 도항리 일대에서 구석기의 일종인 몸돌이 지표에서 수습되었다. 채집된 구석기는 모두 석영제로 연대는 중기 구석기 시대[약 4만 년 전~10만 년 전]에 해당된다. 신석기 시대의 모습도 나타난다. 아직까지 정식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가야 도항리 택지 개발 부지 내의 시굴 조사에서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다소 수습되었다. 확인된 빗살무늬 토기는 세침 선문(細沈線文), 단사 선문(短斜線紋), 구순 각목문(口脣刻目文), 압인어 골문(押引魚骨紋), 삼각집 선문(三角集線文)+자돌 점열문(刺突點列文) 등으로 신석기 시대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함안 지역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때는 청동기 시대부터이다. 함안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가야읍에 분포하는 도항리 선사 유적과 군북 동촌리 고인돌, 칠원의 오곡리와 가마실 유적, 함안면의 봉성동 유적 등이다.
유적에서는 주로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와 고인돌, 논, 고상 가옥 건물 터, 구덩이, 기둥 구멍 자리 등이 확인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이 입지하는 지역은 주민들이 생업 활동을 하기에 아주 편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함안 지역 고인돌 주변에는 논농사와 관련된 배후 습지인 하천이 많다. 또한 고인돌의 입지를 통해서 취락 형성을 추정할 수도 있다. 도항리 고인돌이 발견된 구릉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원형 구덩이 주거지 1동이 발견되었고, 군북면 덕대리에서도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주거지가 있는 구릉의 양쪽에는 군북 지역 최대의 고인돌이 밀집된 동촌리 고인돌군 등이 있다. 이로 보아 함안 지역의 청동기 시대 취락은 고인돌이 입지하는 인근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대: 아라가야]
청동기 시대 이후 가야의 한 나라인 아라가야가 자리잡았다. 아라가야는 변진 안야국(弁辰安邪國)·안라국 등으로 불리었는데 아라가야의 전기인 삼한 시기에는 변진 안야국이었고, 후기에는 안라국이라 하였다. 아라가야는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 선진적인 정치 집단이어서 가야의 여러 나라를 대표하여 백제와 신라로부터 가야를 지켜 내기 위한 외교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아라가야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가야 여러 나라의 ‘형(兄)’, ‘부(父)’의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신라의 진출을 이겨 내지 못하고 560년경 신라에 복속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함안]
아라가야 멸망 후 함안 지역은 신라의 군(郡)으로 편제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함안군이 법흥왕 대에 멸망하고 그 지역을 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멸망 연대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라의 지방 제도인 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에 편입된 함안 지역의 지역 명을 알 수 있는 것은 경덕왕 대이다. 오늘날과 이름이 같은 함안군이다. 함안군은 두 개의 현을 거느렸는데 현무현(玄武縣)과 의령현(宜寧縣)이다. 현무현은 본래 소삼현(召彡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소삼 부곡(召參部曲)으로 강등되었다. 고려성종 때는 함주 자사(咸州刺史)를 두었고, 현종이 함안군으로 복구하여 금주[지금의 김해]에 예속시켰다. 명종은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는데 1373년(공민왕 22) 고을 사람 주영찬(周英贊)의 딸이 명나라 궁인이 되어 총애를 받아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시대의 함안]
조선 시대에 와서도 지방관이 파견되는 군으로 유지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6월 도호부로 승격되지만 이듬해 9월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전국을 23부로 나누었는데 함안군으로서 진주부 아래 소속되었다. 조선 시대 함안 지역에는 충신이 많았다. 고려 말 이오(李午)는 고려가 망한 뒤 함안에 내려와 은거하였다. 그 자신이 고려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은거지 주위에 담을 쌓고 담 밖은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동(高麗洞)'이라고 명시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 연산군 대에 충간(忠諫)으로 일생을 바친 박한주(朴漢柱), 윤석보(尹碩輔) 등이 그들이다. 일제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다 옥사한 안지호(安智鎬) 등 함안의 인맥은 불의에 굽히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서 죽음을 불사한 꼿꼿한 선비 정신을 잘 말해 준다.
[일제 강점기의 함안]
함안군은 1914년 3월 상봉면·하봉면·사봉면이 진주에 환속되어 11개 면이 되었으며, 1933년 죽남면이 군북면에 편입되어 10개 면이 되어 지금의 행정 단위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1944년 여항면 산서 출장소가 설치되어 10개 면 1출장소로 개편되기도 하였다. 일제 시기 함안에서는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다섯 차례에 걸쳐 의거가 일어났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함안 사람들이 일제에 얼마나 처절하게 저항하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5,000명에 가까운 군중이 궐기하였으며, 일본 경찰이 쏜 총탄에 16명이 순국하고 14명이 부상하였다.
[칠원 지역의 역사]
칠원 지역이 함안에 편입된 때는 1906년이다. 칠원은 신라에 병합된 이후 칠토현(漆吐縣)이었다. 757년(경덕왕 16) 칠제현(漆隄縣)으로 개칭되고, 의안군(義安郡)의 속현이 되었다. 지금의 지명인 칠원(漆原)으로 불리게 된 때는 940년(태조 23) 칠원현이 되면서부터이다. 칠원(漆園)이라고도 하였다. 칠원현은 1018년(현종 9) 김해부에 속하였고, 1391년(공양왕 2) 감무를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독립된 행정 구역이 되었다. 칠원현에 현감이 파견된 때는 1413년(태종 13)이었다. 1601년(선조 34) 전쟁으로 쇠잔해지면서 잠시 창원부에 소속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 다시 독립되었다.
칠원현에는 고려 말 공양왕 때부터 바다를 접하고 있는 구산현(龜山縣)을 속현으로 내속시켜 19세기 말까지 유지하였다. 구산현은 일명 은산(銀山)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칠원 지역과는 약 15.71㎞[40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구산현 같은 속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칠원현의 독자적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895년 칠원현은 칠원군으로 개명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전국의 군현이 칙령에 의하여 전국을 23개 행정 구역으로 나누면서 각 부 아래 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함안군은 1979년 가야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9면 1출장소가 되었고, 1980년 군북면 월촌 출장소 설치가 설치되어 1읍 9면 2출장소가 되었다. 1989년 여항면 산서 출장소가 마산시 진전면에 편입되었고, 1999년 군북면 월촌 출장소가 폐지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 칠원면이 칠원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의 2읍 8면 체제로 확립되었다. 6·25 전쟁 시기 함안 지역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이었다. 여항산을 둘러싼 공방전이 그것인데, 그중 주인이 열아홉 차례나 바뀐 의상대 뒷산의 경우 양쪽의 무수한 폭격에 황토색으로 벗겨져 미군들이 ‘늙은 중머리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하니 전투의 치열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