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698 |
---|---|
한자 | 尹桓 |
영어공식명칭 | Yun Hwan |
이칭/별칭 | 충효(忠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고려 후기 함안 출신의 고위 관료이자 공신.
[개설]
윤환(尹桓)[?∼1387]은 고려충숙왕 대부터 우왕 대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섬겼고, 찬성사, 좌정승, 문하시중 등 고위직을 역임하는 한편 두 차례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고향 칠원에 큰 기근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빈민 구제에 힘썼다.
[가계]
본관은 칠원(漆原). 할아버지는 고려충렬왕 때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역임한 윤수(尹秀)이고, 아버지는 대호군을 역임한 윤길보(尹吉甫)이다.
[활동 사항]
윤환은 칠원현[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태어났다. 1328년(충숙왕 15) 호군(護軍)으로 원나라에 가서 모시와 종이를 바쳤으며, 충혜왕 즉위 초에는 대언(代言)으로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1332년 2월 전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정승 윤석(尹碩) 등과 함께 순군(巡軍)에 하옥되었다가 3월에 장형(杖刑)에 처해지고 직첩(職牒)을 추탈(追奪)당하였다. 이때 윤환은 바닷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원나라로 망명하였다.
고려로 돌아온 윤환은 조익청(曺益淸)과 함께 충혜왕의 측근인 송팔랑(宋八郞)·홍장(洪莊) 등을 체포해 순군에 수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1339년(충숙왕 복위 8) 5월, 홍장이 감정을 품고 있다가 참소하여 윤환을 칠원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충혜왕이 복위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郎)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1342년(충혜왕 후3) 6월 조적(曺頔)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輸誠亮節輔理功臣)이 되고, 찬성사로 승진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다시 행성낭중(行省郎中)의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강릉 교주도 도순문사(江陵交州道都巡問使)를 겸했으며, 1349년(충정왕 1) 8월 칠원 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수성양절선력보리공신(輸誠亮節宣力保理功臣) 호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다시 찬성사가 되고 판삼사사를 거쳐, 1356년(공민왕 5) 5월 좌정승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7월 관제 개혁으로 수문하시중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11월 죄를 지어 유배되었다.
1360년(공민왕 9) 칠원후(漆原侯)에 봉해졌다가 칠원백(漆原伯)으로 고쳐 봉해졌고, 1365년 동서북면 도통사(東西北面都統使)가 되었다. 1371년 신돈(辛旽)이 제거된 뒤 7월에 문하시중이 되었고, 8월에 무인으로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임하고 추성병의동덕섭리익찬공신(推誠秉義同德燮理翊贊功臣)호를 받았으나, 이듬해 9월 파직되었다. 1377년(우왕 3), 북원에서 사신을 보내 그를 평장사(平章事)로 임명하였으며, 1380년 다시 문하시중으로 삼았다. 곧이어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387년(우왕 13) 여든 살로 죽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유원리에 있으며 칠원 윤씨 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함안 유원리 윤환 묘역은 2007년 3월 15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2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342년(충혜왕 후3) 6월 조적(曺頔)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 호를 받았다. 1349년(충정왕 1) 8월 칠원 부원군에 봉해지고, '수성양절선력보리공신' 호를 받았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