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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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漕倉 |
영어공식명칭 | Chochang |
이칭/별칭 | 쌀보관 창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설치된 세미(稅米) 창고.
[개설]
익산 지역의 조창은 조선 전기에 덕성창, 후기에 성당창이 설치되었다. 덕성창(德城倉, 德成倉)은 1428년(세종 10)부터 1487년(성종 18)까지 전라도 함열 피포(皮浦), 현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고창리에 설치되었다. 성당창은 현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성당리 일대에 설치되었다. 전라도 전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창은 전국 각 지방에서 납부한 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기 위해 연해나 하천의 포구에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조선왕조 재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조선 시대 조창은 1390년(공양왕 2) 전라도 용안에 득성창(得城倉)의 설치가 그 시발이다. 그러나 득성창은 1428년(세종 10) 함열의 피포로 이동하여 덕성창으로 이름을 바꾼다. 15세기 전반 함열의 덕성창은 전라도 26개 고을의 전세가 수납되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였다. 덕성창의 수세 구역은 고창 일대를 제외한 현 전라북도 대부분 지역과 충청남도의 금산 지역으로 그만큼 수세의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관련 기록]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덕성창에 배치된 조운선의 숫자는 63척이었다. 한성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에 수운판관(水運判官) 2명과 해운판관(海運判官) 1명이 소속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반계수록』 등에 실린 기록을 종합하면 인조[1623~1649] 때 여산에 나암창(羅巖倉)이 설치되어 군산창의 기능을 분담하다가 성당창이 신설되어 나암창의 기능을 대신하였다고 한다. 『1872년 지방지도』의 함열현 지도에는 성당창의 창고 시설이 그려져 있다. 『만기요람』에는 성당창에 12척의 조운선이 소속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내용]
함열 덕성창은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하나로 전라도 전주를 비롯해 26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 말 이래 금강 수계에서는 용안 득성창이 유일한 조창이었으나 물길의 변화로 인하여 득성창이 더는 조창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함열 피포로 옮겨 덕성창이라 하고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덕성창[1428~1487]은 59년간 유지되었다.
성당창은 조선 후기 3대 조창 중의 하나로 함열, 고산, 진산, 익산, 금산, 용담, 남원 등 전라도 8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였다. 성당창은 함열 피포의 옛 덕성창보다 용안 금두포의 옛 득성창과 인접한 지점에 있었다.
[변천]
1428년에 설치된 익산 함열 피포의 덕성창은 1487년에 용안의 금두포(金頭浦)로 이전하여 원래의 득성창으로 환원되었다. 이후 군산창에서도 전라도 산군 일대의 곡식을 수납하기가 용이하지 않자 17세기 초반에는 여산의 나암창(羅巖倉)으로 옮겼다. 그러나 나암창의 수로가 막히자 다시 익산 함열의 진포(鎭浦)에 성당창을 설치하여 함열·고산·진산·익산·금산·용담·남원 등 8개 읍의 전세와 대동미를 보관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면포나 동전 등으로 조세를 납부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세운 보관창고의 필요성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조운제도가 폐지되면서 조창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의의와 평가]
함열 덕성창은 조선 전기 9개의 조창 중 하나로 전주를 비롯해 전라도 26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당시 가장 많은 63척의 조운선이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후기의 성당창은 3대 조창 중의 하나였다. 곧 익산 지역의 조창은 국가 경제력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며, 상대적으로 중앙 통제력이 익산 지역에 미치는 영향 역시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