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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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筠 |
영어공식명칭 | Heo Gyun |
이칭/별칭 | 단보(端甫),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류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569년 - 허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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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허균 정시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허균 문과중시 장원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허균 수안군수 재임 중 파직 |
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허균 원접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영접 |
활동 시기/일시 | 1609년 - 허균 첨지중추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0년 12월 - 허균 익산 함열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12년 - 허균 『홍길동전』 집필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허균 좌참찬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18년 - 허균 사망 |
유배|이배지 | 함열 -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
묘소|단소 | 양천허씨 가족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수정로6번길 54-39[맹리 산6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양천(陽川) |
대표 관직 | 좌참찬 |
[정의]
조선 후기 익산 지역에 유배되었던 문신.
[가계]
허균(許筠)[1569~1618]의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허담(許聃)이고, 할아버지는 허한(許澣)이다. 아버지는 경상감사 허엽(許曄)이며, 어머니는 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 강릉김씨(江陵金氏)이다. 형은 허성(許筬)과 허봉(許篈)이며, 누나는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활동 사항]
허균은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1598년 황해도도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한성의 기생과 가까이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 복귀하여 형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로 재직 중에는 불교를 숭상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6년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할 때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주어 중국에서 허난설헌의 시가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 뒤 삼척부사를 거쳐 공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숭불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책봉사를 영접하고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610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으며, 전시(殿試)의 대독관으로서 친척을 부정으로 합격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12월에 익산군 함열면[현 익산시 함열읍]으로 유배되었다. 허균은 유배지인 함열에서 1611년 64권에 이르는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집필하였고, 1612년 한글소설 『홍길동전』 집필을 끝낸 뒤 바로 석방되어 몇 년간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허균은 이후 몇 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1612년 12월 진주사(陳奏使), 1614년에는 천추사(千秋使), 1615년에는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때 허균은 명나라 문인들과 시문을 매개로 교류하였으며, 그들을 통해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한 각종 서적을 입수하여 귀국하였다. 허균은 1617년에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大北派)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받아 벼슬이 좌참찬에까지 이르렀지만, 1618년 반역을 모의하였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학문과 저술]
허균이 짓거나 엮은 책으로는 『성소부부고』·『홍길동전』·『한정록(閑情錄)』·『국조시산(國朝詩刪)』·『허문세고(許門世藁)』 등이 대표적이다. 『고시선(古詩選)』·『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과 임진왜란을 기록한 「동정록(東征錄)」·「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한년참기(旱年讖記)」 등의 글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허균은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적 소양을 갖춘 학자였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던 불교와 도교사상, 서학(西學)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또한 백성들의 복리(福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문집에 실려 있는 「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 등은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제 타파 및 인재 등용과 붕당 배척 이론을 펼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묘소]
허균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맹리 산61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