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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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晉州姜氏 |
영어음역 | Jinju Gangssi |
영어의미역 | Cheongpung Gwa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인호 |
입향지 | 충청북도 제천시 두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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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충청북도 제천시 두학동 |
성씨 시조 | 강이식(姜以式) |
입향 시조 | 강신(姜信) |
[정의]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신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강씨(姜氏)의 최초 성(姓)을 가진 사람은 중국의 염제신농(炎帝神農)이라 한다. 한국의 강씨는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진주(晋州)로 정하였다. 강이식 장군은 597년[고구려 영양왕 8] 수나라를 공격하였으며, 598년에는 5만의 군사로 임유관(臨楡關)에서 30만 수나라 군을 대파하였다. 진주에 강이식 장군을 모신 봉산사가 있다. 강씨가 진주에 세거하게 된 것은 고구려 멸망 후 강진(姜縉)이 중국의 당과에 급제한 후 태중대부판내의령(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진 이후이다. 그 후손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여 문벌을 떨쳤다. 이러한 진주 강씨는 크게 은렬공파, 인헌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등 다섯 파로 나뉘고 이후 여러 파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강(姜)’자를 씨(氏)로 삼는 성씨는 진주를 단일본으로 하고 있다.
[입향 경위]
제천 두학동의 진주 강씨는 16세기 중엽 강신(姜信)이 제천으로 이주하면서 정착하였다. 진주 강씨는 강구수가 을사사화 때 피적된 후 자제들에게 영진(榮進)을 취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고서 학문에 힘썼으며, 아들 강신은 외삼촌이었던 이연(李演)이 제천현감으로 취임하면서 서울에서 같이 내려와 제천 두학동에 자리를 잡았다.
강신의 아들이었던 강천민(姜天民)[1560~1640]은 강학 활동에 주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령이었던 사담 김홍민(金弘敏)[1540~1594]과 협력하여 퇴계 이황(李滉)을 주향으로 모신 남당서원(南塘書院)을 세워 지역에서의 교육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 후 강천민의 아들 강유가 진사와 문과에 합격하고 정묘호란 때 크게 활약하면서 족세를 성장시켰다. 강유는 도학과 문장에서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으로는 『상곡집(商谷集)』이 있다. 이후 진주 강씨는 지역에서의 강학 활동을 통해 유력 사족세를 유지하였다.
[현황]
조선 중기 강신의 후손들이 자리 잡은 제천시 두학동이 진주 강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이었다. 1964년의 「제천군각읍면씨족별통계표」에 따르면 진주 강씨가 제천읍에 200세대 거주하였으며, 1998년 마을지에 따르면 제천시 두학동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최근에는 본관 성씨별 자료를 수집하지 않아 자세한 세대수는 알 수 없으며, 2000년 자료에 따르면 제천시에는 진주 강씨가 791가구 2,415명이 있었다.
[관련 유적]
서원으로 1580년(선조 13) 제천 남당에 남당서원이 창건되었으며, 선조(宣祖) 때 두학동에 염수재(念修齋)가 건립되었다. 남당서원의 건립에는 현감이었던 김홍민과 진주 강씨 출신인 강천민의 역할이 컸다. 두학동의 염수재는 진주 강씨의 사설 서당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