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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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柳氏 |
이칭/별칭 | 문화류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 |
집필자 | 강민식 |
세거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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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이월면 내촌리|광혜원면 회죽리 |
입향시기/연도 | 조선 후기 |
성씨시조 | 유차달 |
입향시조 | 유헌민 |
[정의]
유차달을 시조로 하고, 유헌민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연원]
문화유씨(文化柳氏)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유주(儒州) 지방의 부호로, 태조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의 어려움을 알고 사재를 털어 수레 1,000량을 제작하여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으로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大丞)에 올랐다. 그 후 8대손 유경(柳璥)은 고종 때 최의(崔誼)의 무신 정권을 무너뜨려 왕정을 복구하는 데 일조하여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봉해졌으며, 유경(柳璥)의 고향인 유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이에 후손들이 유주, 즉 문화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문화는 황해도에 있는 지명이다.
본관은 유주가 문화현(文化縣)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문화로 하였다. 문화유씨는 고려조의 명족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초기부터 정계 중추에 자리를 굳혀 상신 13명, 문형 2명, 호당 10명, 청백리 12명, 공신 23명, 장신(將臣) 4명, 문과 급제자 425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청백리 12명은 이씨 52명, 김씨 27명에 버금가는 숫자이다.
[입향경위]
진천 지방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호조참판에 추증된 유헌민(柳獻民)이 임진왜란 때 부친 유종수(柳宗壽)와 함께 경기도 양주에서 진천군 진천읍 행정리로 피난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400여 년 간 세거(世居)하였다.
[현황]
1846년(헌종 12) 유희원(柳希源), 유진풍(柳鎭豊), 유인영(柳寅暎)이 효자로 이름나 정려가 내려졌다.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문화유씨는 221가구 699명으로 나타났다. 현재는 문백면 옥성리 바사리마을에서 1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월면 내촌리 내촌마을에 30여 가구, 광혜원면 회죽리 회안마을에 50여 가구 중 문화유씨와 해주오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