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715 |
---|---|
한자 | 柳希源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파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연승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유인수의 후손이며, 유학원(柳学源)의 형이다.
[활동사항]
유희원(柳希源)[1769~?]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책을 보면서 밤을 밝힌 채 잠시도 곁을 비우지 않고 간병을 하였다. 엄동설한에도 하늘에 기도하여 잉어를 구해다 봉양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죽과 채소만으로 연명하고, 너무나 슬퍼하며 곡을 한 까닭에 수척해져 보는 사람들마다 안타까워하였다. 어머니가 병환 끝에 실명을 하자 따로 집을 지어 침소로 삼아 옆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봉양했다.
그런데 유희원을 모함하는 사람이 불효막심한 사람이라며 관청에 유희원을 고발하였다. 때마침 유희원의 집 앞을 지나던 암행어사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봉양하는 행동을 보고 크게 감복하여 왕에게 사실을 고해 고발은 없던 일이 되었다.
[상훈과 추모]
유희원이 죽은 뒤 유림들이 효자문 건립을 상소하였으며, 1843년(헌종 9) 효자문의 허락을 받아 1846년(헌종 12)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파재마을 산1-7번지에 효자문이 세워졌다.